[신경진의 민감(敏感) 중국어] 불비불항

신경진 2024. 5. 25. 00:1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민감중국어
라이칭더(賴淸德·65) 대만 총통의 취임사가 양안(兩岸·중국과 대만)을 뒤흔들었다. 라이 총통은 지난 1월 당선 수락연설에서 ‘불비불항(不卑不亢)’을 강조했다. 한자 비굴할 비(卑)와 거만할 항(亢) 앞에 아니 부(不)를 붙여 “비굴하지 않고 거만하지도 않게 (대만해협의) 현상을 수호하겠다”고 했다. 당당한 자세를 일컫는 불비불항의 출전은 명(明) 말기의 문인 주지유(朱之瑜·1600~1682)로 알려진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재상 안영(晏嬰)이 개구멍을 열어주고 외모를 비하하는 초(楚)왕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성어 안자사초(晏子使楚)의 늠름한 태도가 곧 불비불항이다.

불비불항이란 표현 외에도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로 예속되지 않는다” 는 구절 등 라이칭더 취임사의 여러 대목에 중국은 분노했다. 왕이(王毅) 정치국위원은 카자흐스탄 순방 중 연일 “가장 위험한 현상 변경이자 가장 중대한 평화 파괴”라 경고했다. 인민일보는 “‘대만독립 일꾼’이 글로 나라를 팔고 대만에 화를 불렀다”는 칼럼을 싣고 “라이칭더가 ‘양국론(兩國論)’을 팔았다”고 했다.

지난해에는 중국의 한 신문이 한국 안보실장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불비불항이란 표현을 언급한 사례가 있다. 당시 야당 대표와 중국대사의 관저 회동 논란이 일자 이 신문은 “(한국 외교가) 미·일에 ‘비굴(卑)’하고 중국에는 ‘거만(亢)’하다”며 “불비불항에서 더 멀어진다”고 주장했다.

정작 의미심장한 문건은 지난 16일 베이징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중·러 공동성명이다. 2013년 이후 10번째 공동성명에 지난해 모스크바 성명에는 없던 문장이 덧붙었다. “러시아는 중국의 국가 통일을 굳게 지지한다. 중국은 러시아의 안보안정·발전번영·주권과 영토완정(領土完整) 수호를 지지하며, 외부세력의 러시아 내정 간섭에 반대한다”고 했다. 중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동부 4개주 합병과 국제사회의 제재를 반대하고, 러시아는 중국의 대만 통일을 돕겠다는 거래다. 중·러 공동성명에 대만이 처음 명기된 시점도 공교롭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이던 2022년 2월 4일 베이징에서였다. 앞선 7차례 성명에 대만은 없었다. 이후 ‘대만독립’ 반대, 영토완정, 통일실현을 야금야금 추가했다.

대만 지도자의 “불비불항 현상수호”와 중·러의 “통일 협력”이 충돌한다. 대만의 ‘신(新)양국론’에 맞춰 북한까지 남·북 양국론을 내세운 속내도 꽤나 궁금한 요즘이다.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