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 법안 발의' 영국은 650명이 545건, 우린 2명이 608건…단어 바꾸기 꼼수 덕

원동욱 2024. 5. 2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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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막 내리는 21대 국회
지난해 11월 ‘위성정당방지법’ 발의 기자회견. 오른쪽 둘째가 민형배 민주당 의원. [뉴시스]
의회민주주의 발상지인 영국 하원에선 2019년까지 4년간 545건의 법안이 발의됐다. 재적의원 650명의 총합이다. 대한민국 국회에선 의원 두 명이면 족할 일이다. 더불어민주당 민형배(325건)·윤준병(283건) 의원인데 21대 국회에서 대표발의 법안 건수 1, 2위다.

민 의원은 평일 기준으로 3일에 한 건 발의한 셈이다. 이 중엔 신용협동조합법(채무변제를 이유로 부득이하게 취득한 비업무용 부동산에 관한 처분 의무와 방법·절차 등에 규정) 개정안처럼 원안 가결된 것도 있지만(1건), 268건은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된다. 최다 발의면서 최다 미처리 의원이기도 하다.

민 의원이 법안 발의 숫자를 늘린 데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단 몇 글자 바꿔 개정하는 것이다. ‘서면으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서면으로’, ‘지방’을 ‘지역’으로 바꾼 것도 포함해서다. 민 의원이 댄 이유는 “지방이 위계적인 표현”이란 건데 개정안만 6건이었다.

발의했다가 철회하고 한 단어만 바꾸고 다시 발의한 것도 있었다. 철회된 것도 발의 숫자에 들어가니 이중계산된다. 5·18 민주화운동의 정의 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의 법안이 그 예다. 지난 2020년 12월 1일 4개 법안을 발의했다가 철회하고 제안 이유 중 ‘국민’이라는 단어만 ‘시민’으로 바꾼 후 똑같은 내용의 법안 4개를 2020년 12월 8일 재발의했다. 일반 시민인 이용후(32·수원시)씨가 “이런 식이면 나도 법을 10개는 만들겠다”며 “말이 좀 더 친절해지면 개정안인 거냐”라고 의문을 가질 법하다.

폐회 엿새 앞두고도 법안 발의

속칭 ‘여의도 래커’ 입법도 보인다. 이슈가 되면 줄줄이 관련 법안이 발의되는 걸 말한다. 2022년 12월 제2경인고속도로 방음터널 화재로 인명피해가 발생한 후 민 의원은 이듬해 2월 관련 규제를 강화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윤두현 의원(2023년 1월 18일), 최춘식 의원(2023년 2월 3일)이 같은 취지의 개정안을 이미 발의한 상태였다. 문재인 정부의 통계조작 논란이 일자, 통계청장을 3년 임기제로 하고 국회 인사청문 대상에 포함하자는 내용으로 국가공무원법 등 4건의 법안을 내기도 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민 의원이 최다 발의자라 길게 예로 들었지만 다른 의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윤준병 의원의 경우 ‘지득(知得)하다’ ‘채록(採錄)하다’ ‘체납처분’을 ‘알게 되다’ ‘정리·기록하다’ ‘강제징수’로 바꾸는 법안 6건, ‘구거(溝渠)’를 ‘도랑’으로 개정하는 법안 10여 건, ‘속행’을 ‘계속 진행’으로 바꾸는 법안도 다수 냈다.

국민의힘에서 대표발의 건수 1위인 이종성 의원(211건)은 ‘심신장애’라는 표현이 장애인 차별적이니 다른 표현으로 바꾸라는 내용의 법안 14개를 같은 날 발의했다. 법 위반 행위가 적발된 영업장이 처벌을 피하려고 해온 폐업 신고를 마음대로 하지 못 하게 한 유사한 법안 8개도 같은 날 발의했다. 같은 당 김성원 의원도 ‘보철구(補綴具)’라는 단어를 ‘보조기구’로 바꾸는 내용의 법안을 지난 2021년 하루에 7건 발의했다.

지난 국회에서 임기만료와 함께 폐기됐던 법안을 다시 내는 것도 발의 건수를 늘리는 방식이다. 재선인 정춘숙 민주당 의원은 초선 때인 20대 국회에서 발의했다가 폐기된 법안 81개 중의 75개를 유사하게 다시 발의했다.

2만5846건. 임기 종료가 4일 앞으로 다가온 21대 국회에 발의된 총 법안 수다. 이 중 의원발의는 2만3649건이다. 역대 최고였다는 지난 국회 수치(2만1594건)를 또 넘어섰다.

의원입법이 잠시도 멈추지 않은 덕인데, 최근에도 총선일까지 9일간만 발의된 법안이 없을 정도였다. 며칠 후면 국회를 떠날 이탄희 민주당 의원이 23일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장혜영 녹색정의당 의원도 24일 국세기본법 등 3건의 개정안을 냈다. 21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될 법안들이다.

입법이 국회의원 본연의 업무란 측면에서 법안 발의 증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다. 회사원 정연주(44·용인)씨는 “사소한 단어가 바뀌는 것 자체로 국민이 한 번 더 그 법에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나”라며 “그래도 뭔가를 하려는 것 같아 긍정적이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법안 하나를 개정하려면 나무 수백 그루를 베어야 만들 수 있는 분량의 복사지가 필요하다”(손낙구)란 비유에서 드러나듯, 입법엔 엄청난 자원이 투입된다는 점에서 비판적 시각이 우세하다. 상임위 전문위원이나 법제실 등 입법 지원 기관의 역량을 늘리지 않은 채 법안 발의만 급증하다 보니 법안의 질과 검토 의견의 수준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현출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엄청난 재원을 들여 단어 바꾸기 등의 법안들을 내는 행태는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이런 것들을 들어내야 입법의 질이 올라간다”고 말했다.

“발의만 해놓고 홍보·실적용으로 이용”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법안의 질적 측면이나 법의 안정성 측면에서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법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뀐다면 시민들은 어떤 법을 따라야 할지, 지금의 법이 어떤 상태일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법조계 일각에선 해병대 채 상병 수사 주체 논란의 원인이, 2021년 성추행 피해자였던 공군 이예람 중사의 비극적인 사망 사건이 발생한 이후 국회에서는 정밀한 논의 없이 법을 개정하면서 군사법원법이 불명확해졌기 때문이란 지적도 나온다(송광석 율촌 변호사). 변사사건의 경우 해병대 수사단에 아예 수사권이 없다는 해석도 나와서다.

의원발의 양태가 어느 정도 이례적 수준인지 주요 민주주의 국가와 비교하면 확연하다. 의원내각제 국가의 경우 내각이 입법을 주도하기 때문에 발의 자체가 적다. 영국이 4년 평균 572건, 독일 847건, 일본 947건 정도다. 대통령제 국가인 프랑스도 4년 평균 2043건이 발의됐는데 의원당 3.5건에 해당한다. 미국 정도가 의원입법이 활발한 편인데, 2019년 기준으로 접수 법안이 2만1737건이다. 일견 우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나 선출 의원 수가 535명이나 된다. 1인당 발의 건수는 우리의 절반에 못 미치는 셈이다. 이현출 교수는 “미국은 상임위에서 폐기되는 법률이 85% 정도 된다”며 “상임위와 소위원회의 기능을 강화해 폐기할 법안은 폐기해야 무분별한 발의를 제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동료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라고 유보하는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바탕에는 김영삼 정부 이후 시민사회의 의정감시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법률안 발의 건수로 입법활동의 성실성을 평가하던 게 관행이 됐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공천 잣대로 이용한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발의만 해놓고 홍보용, 실적용으로만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정치학자 박상훈 박사는 “‘더 많은 입법’이 아니라 ‘더 중요한 입법’이 우리 국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여야 한다”며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법안을 사전 검토를 통해 선별 발의하고, 충분한 심사와 토론, 조정을 거쳐 법률로 만드는 ‘입법의 민주적 권위’를 구축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어 “시민단체들도 법안 발의 건수와 같은 양적 지표를 과용해 줄세우기식 의원 평가를 반복하기보단 입법부가 제 역할을 하고 권한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하는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자체적으로 입법영향분석을 시행, 관련 보고서를 발간하고 세미나·간담회 등을 열고 있지만 흐름을 바꾸기엔 역부족이다. 입법심사 부실 등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입법영향분석 제도’ 도입을 논의하고 있지만 관련된 계류 법안 6건 중 3건은 발의된 지 3년이 지났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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