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적 산수화? 조선은 실경의 나라였다

권근영 2024. 5. 2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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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으로 본 조선 1~3
옛 그림으로 본 조선 1~3
최열 지음
혜화1117

“당연히 나라 안에 제일가는 명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고려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는 말이 어찌 헛말이랴.”

조선 실학자 이중환(1690~1752)이 『택리지』에서 언급한 이 명산은 금강산. 숱한 화가들이 여러 차례 찾았다. 코스도 다양했다. 신라 때는 동해에서 해금강 통해 외금강으로 진입했다. 고려·조선 때는 개성이나 한양에서 출발해 내금강으로 들어가 해금강으로 나갔다.

금강산의 고운 단풍을 담은 정수영의 ‘집선봉 북록’. [사진 혜화1117]
말이나 조랑말을 타고, 간소한 가마인 견여·남여에 올라, 가파른 곳은 굴비 엮듯 서로 끈으로 묶은 채 절경을 보러 갔다. 18세기 조선에 불었던 유람 열풍 덕에 명승지 그림을 집에 걸어두고 누워 즐기는 ‘와유(臥遊)’도 인기를 끌었다. 너도나도 앞다퉈 실경을 그렸는데 소재로는 단연 금강이 으뜸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리니 제각각 다른 관점과 필치로 금강산의 다양한 표정이 나왔다. 신간 『옛 그림으로 본 조선』 1권 ‘금강’은 금강산을 그린 조선 실경화를 집대성한 첫 저술이다.

이걸로 그치지 않는다. 2권 ‘강원’, 3권 ‘경기·충청·전라·경상’까지 세 권이다. 총 1520쪽 분량에 옛 그림 1300여 점을 수록한 노작이다. 완간 소감을 묻자 미술사학자인 저자 최열은 “두렵다”고 했다. “한꺼번에 다 모아놓는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또 출판이 어렵다는데 이런 책을 내놓아도 되나 겁도 났다”고 말했다.

금강산 절경을 담은 김홍도의 『해산도첩』 중에서 ‘묘길상’. [사진 혜화1117]
저자의 염려와 달리 4년 전 나온 전작 『옛 그림으로 본 서울』은 6쇄를 찍으며 이듬해 『옛 그림으로 본 제주』를 낳았다. 그림 속과 같은 풍경이 오늘날 한 곳도 남아 있지 않은 600년 수도 서울의 아스라한 옛 그림 125점, 지역 화가들의 개성 있는 필치로 남은 제주의 옛 그림 130점이 각각 수록된 두 책은 코로나 팬데믹에 붙박여 움직이지 못하던 독자들 마음을 움직였다. 이번 신작은 서울 편과 제주 편을 들고 “내 고장 그림은 없던가” 줄기차게 물어온 독자들에 대한 저자의 화답이다.

서울서 출발해 제주 돌아 금강과 강원, 경기·충청·전라·경상을 아우르며 자료 찾고 글을 쓰는 노정에 30년이 걸렸다. 시작은 “중국의 관념 산수화를 수입한 조선엔 실경이 없다. 겸재 정선 정도뿐”이라던 어린 시절 가르침에 품었던 반발심. 정말 겸재 뿐일까. 실제 경치를 그리지 않았다니, 그럴 리 없다는 저자의 오랜 궁금증은 옛 그림에 인연이 닿았다. 점령자들이 찍기 시작한 20세기 초 우리 땅의 사진은 참담했지만, 옛 그림은 도리어 낯설고 신기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실경의 숲에서 서른 해”를 보낸 저자는 감히 말한다. “조선은 실경의 나라요, 실경의 천국이다.”

부산 다대포의 승경을 포착한 김윤겸의 ‘몰운대’. [사진 혜화1117]
그림 중에는 저자가 “조선 리얼리즘의 창시자”라 부른 겸재 정선과 “조선 리얼리즘의 완성자” 단원 김홍도의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저자의 눈길은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은 채 국토를 유람하며 숱한 실경을 그린 정수영(1743~1831), 스물셋에 고향 원주에서 금강산과 설악산 유람에 나서 기행문을 남긴 기생 김금원(1817~53), 그리고 강릉 출신 여류 문사 난설헌 허초희(1562~90)에 머문다. 언더독을 표나게 편애하는 그는 서자 출신 김윤겸(1711~75)도 눈여겨보라 한다. 벼슬은 잠시, 생애 내내 국토를 유람한 김윤겸은 과감히 반만 채운 구도의 경쾌한 실경을 남겼다. 우리에게 겸재·단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여러 화가의 관점과 사연이 모여 조선 실경의 모자이크를 이뤘다.

땅의 아름다움보다 자산가치를 보는 ‘임장’과 ‘영끌’의 시대다. 저자는 책에 거론한 땅의 3분의 2는 직접 밟아봤건만 서울 도봉산 자락 아파트에 30년 넘게 살고 있는 주변머리의 서생. 그는 현재 갈 수도 없는 금강산을 앙망한다. 가 보고 싶은 곳은 고려부터 조선까지 이어진 천 년의 코스, 단발령에서 외금강 바라보는 육로길이다. 그가 가 보라 권하는 곳은 깊고 험악한 산세가 완만하게 느껴지는 봄의 설악이다.

팔랑팔랑 책장 넘어가게 하는 긴박한 스토리는 없다. 그보다는 곁에 두고 짬짬이 빈둥거리며 옛 그림을 들춰보는 ‘와유’가 이 책의 사용법. 들여다보면 배 위에서, 산마루에서 절경에 넋 놓은 사람들이 보이고, 함께 가고픈 이들이 머리에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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