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의 책과 미래]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2024. 5. 2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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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의 시대다.

"그런 짓을 한 건 가문의 수치야!"라는 말에서 보듯, 수치는 개인을 둘러싼 가족이나 집안의 명예 상실, 사회나 국가의 지위 저하 등이 낳은 결과이자 효과였다.

전통적으로 사회적 상태를 가리켰던 수치가 개인의 감정으로 바뀐 것은 근대 이후부터다.

그러나 그로 교수는 자기 부정과 모멸감을 부르는 심리적 상태로 전락한 수치의 윤리적·사회적 차원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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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의 시대다. 부정과 불의를 아랑곳하지 않는 뻔뻔함이 정치적 '좋아요'를 받고, 무례와 혐오를 부추기는 파렴치가 사회적 '하트'를 얻는데, 공동체 전체를 생각하면서 차분하고 신중히 행동하는 태도는 오히려 조롱당하고 조리돌림의 대상이 된다. 타인의 눈을 의식해 행동을 조심하고 자기를 절제하는 지혜가 드물어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당황해서 스스로 묻곤 한다. '수치는 혹여 나만의 감정인가.' 인간으로 살아가기 참 힘든 시절이다.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책세상 펴냄)에서 프레데리크 그로 파리12대학 교수는 "수치심이 우리 시대의 주된 정서"가 되었다고 말한다.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자기 비하적 수치심에 내몰리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수치는 본래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짓을 한 건 가문의 수치야!"라는 말에서 보듯, 수치는 개인을 둘러싼 가족이나 집안의 명예 상실, 사회나 국가의 지위 저하 등이 낳은 결과이자 효과였다.

전통적으로 사회적 상태를 가리켰던 수치가 개인의 감정으로 바뀐 것은 근대 이후부터다. 자본주의 사회는 명예보다 돈이 앞서는 사회, 이익을 위해 언제든 평판 따위는 내던질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수치는 점차 돈 없는 사람들, 또는 장애나 질병이나 육아 등으로 일하지 못하는 이들이 느끼는 일상적인 감정이 되었다. 이들은 의지박약이나 게으름 탓에 뒤처진 존재로 멸시되고, 더럽고 오염된 존재로 여겨져 배척당한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수치는 무조건 피하고 넘어서야 할 어두운 감정일 뿐이다.

그러나 그로 교수는 자기 부정과 모멸감을 부르는 심리적 상태로 전락한 수치의 윤리적·사회적 차원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치는 편의와 상스러움과 배덕의 문턱에서 우리를 붙잡아서 멈춰 세운 후, 무엇이 품격 있는 삶인지를 생각게 하는 힘이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더 나은 삶의 방식을 떠올리려고 애쓸 때, 우리는 타인을 생각하고 공생을 북돋우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한마디로, 수치는 윤리의 바탕이자 사회 연대의 출발이다. 자신이나 타인의 부적절한 행위, 물질에 중독돼 인간적 도리를 잃어가는 이 천박한 세상에 휩쓸리는 대신 이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세상 변화를 일으킨다.

프리모 레비는 말했다. "저항할 능력을 온전히 간직할 힘을 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이요,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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