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노동자·트럼프·몸의 노화 …'인간의 질문' 고스란히 담은 칸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5. 24.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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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누구에게
프랑스 칸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팔레 드 페스티벌 본관의 뤼미에르 극장 진출입로 계단. 흔히 '레드카펫을 밟았다'는 표현은 바로 이 계단 위에 섰다는 걸 뜻한다. 23일(현지시간) 오전 칸영화제 참석자들이 뤼미에르 극장으로 들어서는 모습. 칸 김유태 기자

'섹스토이에서 신데렐라로.'

프랑스 남부도시 칸에서 개최 중인 올해 제77회 칸영화제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23일, 현지시간)만큼은 저 한마디로 요약이 가능할 듯하다. 성매매 스트립걸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다룬 한 편의 '섹스 코미디'가 압도적인 찬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션 베이커 감독 '아노라'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Anora)'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노라'는 칸영화제를 취재하는 세계 외신 기자들이 현지에서 참고하는 영화 전문 매체 스크린데일리에서 평점 3.3점(4점 만점)을 받았는데, 22편의 황금종려상 후보 중 3점을 넘긴 다른 영화가 단 한 작품도 없는 데다, 12명의 심사위원 중 6명이 별 4개(만점)를 줬기 때문이다. 높은 평점이 반드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이런 기세라면 본상 수상이 강력하게 점쳐진다.

전날인 22일 칸영화제 본관 팔레 드 페스티벌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살펴본 영화 '아노라'는 한국 영화 '기생충'을 떠올리게 한다. 폭소를 이끄는 끝없는 유머 사이로 서늘한 칼날 같은 비판 지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스트리퍼 아노라의 성매매 현장으로 향한다. 그곳은 지불 가격의 높고 낮음에 따라 여성의 몸을 단계별로 '사서 즐길 수 있는' 업소다. 아노라는 그곳에서, 철은 없지만 자신의 예쁜 몸에 푹 빠진 러시아 고위 권력자의 아들 이반을 만난다. 이반은 아노라에게 '주급 1만5000달러'를 약속한 뒤 자신의 집에 아예 거주하게 만든다. 이반에게, 아노라는 '섹스토이'다. 급기야 사이가 좋아진 두 사람은 장난 삼아 뉴욕으로 가서 결혼한다. 최하층부 성노동자가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아노라'가 상영된 뤼미에르 대극장은, 무려 '1~2분 간격'으로 폭소가 터질 정도로 웃음바다를 이뤘다. 그러나 '아노라'는 결코 단순하게 해석될 수 없는 영화로 보인다. 권력자(이반과 부친)는 그저 자신의 욕구대로 행동할 뿐이고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며 분투하는 건 여성(아노라)과 하수인 셋(노동자)이어서다. '부친-이반-아노라-하수인 셋'이 일련의 계급 구도를 이루는 가운데, 아노라와 하수인 셋이 싸운다는 점에서 '기생충'의 기택 부부와 문광 부부의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

베이커 감독은 성노동자, 소외계층, 사기꾼, 노숙자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작품화한 세계적인 감독이다. 그러나 작품엔 우울감보다는 유머로 가득하다. 칸 외신 기자회견에서 만난 베이커 감독은 "최근 다섯 작품이 성노동자에 대한 영화였는데, 그 과정에서 성노동자를 접촉하고 친해지면서 '그 세상에는 전할 이야기가 100만개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알리 압바시 감독 '어프렌티스'

스크린데일리 평점에서는 최하점(1.7점)을 받았지만 상영과 동시에 세계적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 있으니, 바로 '트럼프의 성폭행'을 다룬 알리 압바시 감독의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그가 변호사 로이 콘을 만나면서 어떻게 현재의 사고방식을 갖게 됐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하는 전기 영화다. 이 작품은 트럼프가 "고소"를 운운할 정도로 논란이 커진 상태다.

어리숙했던 젊은 트럼프는 변호사 로이 콘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게 된다. 둘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돈이다. 이를 위해서는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켜 판사의 승소를 받아내는 일만이 중요하고, 노골적으로 사실을 비틀어 싸움에서 물러서선 안 된다. 콘이 트럼프에게 주문한 원칙은 이렇다. "어택, 어택, 어택(Attack, Attack, Attack)."

이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첫째, 상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공격하라, 둘째, 현실을 비틀어 나의 논리를 판사에게 주장해 반드시 승소하라.' 콘은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만이 있다. 바로 킬러와 루저"라면서 트럼프에게 '어둠의 교습'을 진행한다. 그 수업에는 정의라는 단어가 없다.

압바시 감독은 칸 외신 기자회견에서 "오늘의 역사는 콘의 어두운 그림자를 경험 중이다. 진실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 그리고 거짓말은 끔찍한 운명에 도달했다"고 일갈했다. 또 트럼프의 소송 발언에 대해선 "선거가 영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웃어넘겼고,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오늘의 광기가 어떻게 준비됐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라'는 문장을 기자들 앞에서 읽기도 했다.

코럴리 파지트 감독 '더 서브스탄스'

칸영화제 본상 수상이 유력해 보이는 또 하나의 작품은 데미 무어가 전라(全裸) 연기를 보여준, 코럴리 파지트 감독의 공포영화 '더 서브스탄스'다. 스크린데일리 평점은 2.7점.

이 영화는 '왕년의 대스타'로, 오십이 넘은 나이에 에어로빅 프로그램 진행자에서 밀려날까봐 두려워 전전긍긍하던 주인공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한 번의 투약만으로 젊은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신약을 자기 신체에 직접 주입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주연 배우 데미 무어는 외신 기자회견에서 "여자를 보는 남자의 관점에 대한 영화"라고 '더 서브스탄스'를 소개하면서 "주인공 스파클은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그건 바로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참고로, 데미 무어는 이 영화에서 올 누드로 열연하는데 "영화에 나온 내 몸은 모두 다른 사람(대역)을 쓴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영화엔 살이 처지고 군살이 있는 몸인데, 데미 무어는 전신 성형을 받아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젊은 육체에 대한 갈망'이란 점에서 데미 무어를 캐스팅한 것은 오묘한 구석이 있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감독 '슈라우드'

세계적 거장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슈라우드'는 소멸하는 육체에 대한 고민을 담은 영화다. 뱅상 카셀이 주연 카쉬 역을 맡았다. 카쉬는 4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슬픔에 빠져 지내다 첨단 장례 사업을 시작한다. 센서가 장착된 수의를 입으면 현재 모습이 디지털화돼 묘비의 액정 스크린에 보이는 신기술이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죽은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도 가능하다. 카쉬의 이 논쟁적인 기술은 뜻밖의 테러로 이어지고, 카쉬는 범인을 찾아 나선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슬픔에 갇혀 버린다. 그러나 슬픔과 그리움 속에서 상대를 잊지 않기 위해 어머니의 목걸이, 아버지의 시계와 같은 물건을 하나쯤 품는다. 그런데 망자의 모습을 보고 망자와 대화하도록 돕는 첨단 기술이 실제로 도입되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삶과 죽음의 이분법이 사라지고 '제3의 영역'이 등장하는 세상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이 된다.

기자회견에 모습을 보인 크로넌버그 감독은 "43년을 같이 산 아내의 죽음을 경험한 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 이야기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므로 '슈라우드'는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카림 아이누즈 감독 '모텔 데스티노'

카림 아이누즈 감독의 '모텔 데스티노'는 한 청년의 맥박이 그대로 전해지는 누아르 영화다.

열대지방의 한 '섹스용 모텔'로 21세의 청년 헤랄두가 도망치듯 쫓겨온다. 그는 모텔 주인 엘리아스와 그의 아내 다야나에게 일자리를 부탁한 뒤 모텔 핸디맨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삶도 감정도 우연이 겹치는 법.

방 곳곳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낡은 모텔에서 헤랄두와 다야나는 서로의 몸을 탐한다. 이제 남은 건 다야나의 남편 엘리아스. 여기서부터 '포르노 코미디'가 시작되고 완성된다. '사랑과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 영화는 단지 불륜 서사만은 아니다. 그 청년의 불안과 공포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한 이방인의 실제 삶을 통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는 작품도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리모노프'란 작품으로, 소련 시절의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 뉴욕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지만, 환멸을 느껴 다시 소련으로 돌아가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려다 실패한 실존 인물 에도아르도 리모노프를 추적하는 영화다. 리모노프가 "I'm nowhere(나는 어느 곳에도 없다)"라고 말하는 후반부 장면이 인상적이다.

영화 '베테랑2'에 출연한 배우 황정민,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 류승완 감독, 배우 정해인, 조성민 외유내강 부사장(왼쪽부터)이 21일(현지시간)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모습.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메갈로폴리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친절의 종류', 자장커 감독의 '파도에 휩쓸려', 자크 오디아르 '에밀리아 페레즈'도 유력한 황금종려상 후보작으로 보인다. 올해 칸영화제 시상식은 25일(현지시간) 오후 7시쯤 열린다. 한국 시간으로는 26일 새벽 2시쯤이다.

[칸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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