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 아세안 한류의 원류다[가깝고도 먼 아세안](30)

2024. 5. 2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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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를 방문한 조선 사신이 묘사한 베트남 사신의 모습. thethaovanhoa.vn



“한류의 시작은 베트남이다.”

2003년 9월 주베트남 대한민국 대사관의 한우창 홍보관은 ‘베트남의 한류 현상’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당시 베트남에서 선풍적이었던 한류 현상 소개와 그 원인을 분석했다. 이 글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베트남 거주 한국인들은 베트남이야말로 한류의 원류라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라는 부분이다.

‘한류’라는 단어는 1997년 대만 언론이 처음 만들어 썼다. 이를 중국 언론이 대대적으로 사용하면서 ‘외국에서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열광적인 선호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한류는 중화권에서 가장 먼저 시작돼 아세안, 중동까지 확산했다고 인식한다. 하지만 당시 베트남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들은 이에 동의할 수 없었다. 중국에서 한류라는 단어가 생성되기 이전부터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 문화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친근함을 느꼈고, 베트남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동질감을 느꼈다. 당시 베트남 거주 한국인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지 않은 것이 베트남에서 한국 문화와 상품의 인기는 수백 년 전부터 이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상품의 인기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최병욱 인하대 교수의 ‘한국과 베트남 사신 북경에서 만나다’와 박희병 서울대 교수의 ‘조선 후기 지식인과 베트남’이라는 논문을 살펴보면 16세기 말 중국 명·청 시절 북경에서 만난 조선과 베트남 사신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같은 한자 문화권의 조선과 베트남 사신들은 필담을 통해 서로의 정세를 묻기도 하고 시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다. 특히 조선 실학파의 선구자인 이수광은 1597년 명나라 사신으로 베이징에 다녀오면서 베트남 사신과 나눈 대화와 시문을 엮어 쓴 <안남국사신창와문답록>을 통해 베트남을 조선에 소개했다. 그리고 이수광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극찬받는 <지봉유설>에서 베트남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남기기도 했다.

베이징에서 이수광과 친분을 쌓은 베트남 사신 풍극관(풍칵꽈안·Phung Khac Khoan)은 당대 베트남에서 추앙받는 위대한 정치인이자 학자였다. 지금도 하노이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가 있을 정도다. 그런 인물이 베이징 사신으로 돌아와 이수광의 시를 베트남에 소개하니 베트남 상류 사회에서 대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는 나중에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베트남에 3번이나 다녀온 조완벽이라는 사람을 통해 알려졌다. 조완벽이 베트남에 당도하니 베트남 관료들이 이수광의 시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이수광과 같은 조선 사람이라며 조완벽을 환대했다고 한다. 당시 베트남 지식인 사이에서 이수광이 조선의 ‘한류 스타’였던 셈이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 베트남판 포스터. 유영국 제공



우리나라 최초의 한류 상품이 ‘인삼’이라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미 1500년 전 삼국시대부터 당나라에 인삼을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국제무역도시 벽란도를 통해 중동으로까지 수출했다. 최 교수의 또 다른 논문 ‘19세기 전반 베트남에서의 고려인삼’에서는 사신단에 의해 북경으로 간 인삼이 베트남에 유입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고 있다. 중국 황제에게 받은 선물과 중국에서 밀무역을 통해 베트남에 유입된 한국 인삼은 베트남 황제가 공신들에게 주는 특별 하사품으로 쓰였다. 1760년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강장환이 일기체 형식으로 작성한 <북원록>에는 베트남 사신이 선물을 보내며 간절히 인삼을 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을 정도로 베트남에서 인삼의 인기는 최고였다. 뉴욕대학교 인류학과 이혜민 박사의 ‘루이 14세의 인삼’이라는 논문에서는 1686년 프랑스를 방문한 시암(태국)의 사절단이 루이 14세에 인삼을 선물했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인삼이 재배되지 않으니 중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한국의 인삼을 들여와 프랑스까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지역에서 인삼을 꾸준히 수집했고 동인도회사를 이용해 대량 매입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1910년대부터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아세안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인삼 무역을 하는 한국인들이 수십여명 있었다고 한다. 1938년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자료에 의하면 54명의 한국인이 베트남에 거주하는데 베트남 북부 하이퐁에서 인삼 무역으로 거부가 된 한국 교민이 있을 정도로 베트남에서 한류 상품 인삼의 인기는 대단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드라마와 가요 인기

한국 드라마 <의가형제>의 베트남판 포스터/유영국 제공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한국 교민들이 대거 철수한 것도 잠시, 1980년대 말 베트남에 개혁·개방 정책이 시행되고 1990년대 들어 한국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한국 드라마도 베트남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한국문화원은 한국 문화 보급 차원에서 한국 드라마 저작권을 사들여 베트남 방송국에 무상으로 공급했다. 한국 기업들도 무상 또는 매우 낮은 가격으로 드라마를 공급했는데 그 대가로 드라마 방영 시작과 끝에 자사 광고를 따내면서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 1996년 HTV(호찌민 TV)에서 한국드라마로는 최초로 <금잔화>가 방영되면서 한국 드라마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2002년 이한우 서강대 교수의 ‘베트남에서의 “한류”, 그 형성과정과 사회경제적 효과’ 논문에 따르면 1997년 <느낌>, 1998년 <내 사랑 유미>·<의가형제>·<아들과 딸>이 인기리에 방영됐다. 다음 해 연이어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별은 내 가슴에> 등이 방영됐는데 베트남에서 방영된 한국드라마는 1999년 45편, 2000년 60편에 달했다. 베트남 TV를 틀 때마다 매일 여러 편의 한국 드라마가 나올 정도였다.

2000년에 들어서는 베이비복스, NRG, 젝스키스 등 한국 대중 가수들의 노래가 베트남 젊은 층에 폭발적 인기였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한국 가수처럼 머리를 염색하고 화장하는 젊은 층과 이를 반대하는 기성세대 간의 갈등이 큰 사회적 이슈였다. 그 이후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한국에서 인기 있는 가수들과 노래는 베트남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최고의 절정은 2023년 7월 예매사이트가 문을 열자마자 매진을 기록한 블랙핑크의 하노이 공연이었다. 이 정도면 한류는 베트남에서 먼저 시작됐다고 말하는 한국 교민들의 말이 허언은 아닌 셈이다.

아세안 대부분 지역에서 70~80% 시장점유를 하는 일본 자동차들의 등쌀에 한국 자동차 시장점유율이 3~5%에 불과하다. 그런데 베트남에서만 유일하게 현대차·기아가 35%를 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류 덕분에 한국 제품이 잘 팔릴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다. 한류 열풍이 한국 상품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게 할 수는 있지만, 무조건적인 판매를 끌어내지는 못한다는 의미다. 또 한류 열풍을 문화 식민지 건설로 잘못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관한 내용은 다음 편에서 다룬다.

호찌민 | 유영국 <베트남 라이징>·<왜 베트남 시장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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