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딱 좋은 바람과 햇볕으로, 누가 아침을 차렸지?

이주현 기자 2024. 5. 2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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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마음책방]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최진영 작가 인스타그램 @jychoioioi
삐삐언니의 마음책방은?

책을 많이 읽으면 똑똑해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새로 알게 된 것보다 잊어버리는 게 더 많기 때문에 지식 총량이 늘어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이해력이 좋아지는 건 분명합니다. 나를 위로하고 타인을 격려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지요. 좀더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은 삐삐언니가 책을 통해 마음 근육을 키우는 과정을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누가 죽은 것도 아닌데, 나이 많은 어른이 고개를 숙여 흑흑흑 우는 걸 처음 봤습니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아침창) 마지막 방송이었어요. 2000년 10월부터 2024년 3월까지 24년간 진행해온 프로그램과 이별하는 날이었는데, 마지막 곡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를 부르고 나선 서럽게 흐느껴 우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김창완은 광고가 나오고 있으니 방송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운 것이었습니다. 마침 이날은 영상으로 촬영되고 있어 스튜디오에 계속 카메라가 돌아갔던 거지요. 일종의 ‘방송사고’ 같았지만 오히려 진한 ‘고별식’이 되었습니다.

사실 나는 출근을 하느라 아침 9~11시까지 나오는 이 방송을 들은 적이 거의 없어요. 김창완이 직접 모든 오프닝 멘트를 쓴다던데, 본래 기발한 생각을 하는 분이니 얼마나 맛깔나게 잘 쓸까 하면서도 찾아볼 생각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울던 모습이 잊히지 않던 와중에, 한 유튜브 채널의 인터뷰를 봤더니 더욱 놀라고 말았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방송 직전 스튜디오에 들어와 앉았을 때 오프닝 멘트 원고를 썼다는 거예요.

최진영 작가 인스타그램 @jychoioioi

이유가 신선했습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아침의 느낌을 전달하려면 그날 아침 갓 지어낸 글을 써야 한다는 거였어요. 칼럼 순서가 돌아오면 48시간 전부터 찜찜해 하다가, 24시간 전쯤엔 좌불안석·전전긍긍하다가, 8시간 전엔 마감을 해놔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나로선 정말 경이로운 이야기였습니다. 더욱이 일을 미루는 습관이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글의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니!

셀럽들의 짧은 글 모음집은 다소 ‘굿즈’같은 느낌이 들어 잘 사보지 않는데요, 김창완이 ‘아침창’에서 들려준 글들을 모은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웅진지식하우스)만큼은 사봐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김창완의 저서를 두 권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미 내 책장엔 김창완의 동시집 ‘무지개가 뀐 방이봉방방’(문학동네)이 들어와서 삼년쯤 살았거든요.

책을 펼쳐보니 36.5도 사람의 온기를 지닌 따뜻한 구절이 많았습니다. 시청자들이 행복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착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 테지요. 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지닌 사람은 긍정적인 태도를 지닐 수 있다잖아요? 김창완은 “나의 청춘은 초록이 아니라 어지럽고 불안한 노란빛이었다”고 썼던데, 방황하는 영혼도 매일 좋은 아침을 맞다 보면 낙관적 성향으로 바뀌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을 때, 또 내가 살짝 외로워질 때를 대비해 몇몇 구절을 적어뒀습니다. 고르기가 어렵지만 그냥 내 맘대로 ‘삐삐언니 초이스 베스트 3’을 정해봅니다. 아침, 관찰, 음악. 세 가지 키워드를 찾았습니다.

#1. 어느 날 아침 김창완은 아이유의 ‘가을 아침’ 노랫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노래로 서늘한 아침을 열게 된 즐거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빵 만드는 분 얘기를 들었는데, 계란이고 우유고 버터고 다 실온이 되게 맞춰야 한다는 말이 있었어요. 안 그러면 반죽이 엉겨 붙고 잘 안 섞인다나. 빵 하나도 그런데 이런 아침을 빚으려면 얼마나 복잡하겠어요. 강물 온도랑 잠실 풀밭의 온도도 맞춰놔야 하고 어딘가의 공기를 잘 부풀게 해야 바람도 살랑살랑 불 것 아니에요. 그것뿐이 아니에요. 이런 아침 시간 맞춰서 딱 내놓으려면…. 아이고 밤 꼴딱 샜을 거예요 자고 일어나니 이런 아침이 차려져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2. 매일 글을 쓰려면 늘 뭔가를 관찰해야 합니다. 어느날 동네에서 김창완은 다음과 같은 장면을 목격합니다.

“유모차를 밀고 가던 젊은 엄마가 유모차를 미끄럼틀 옆에 세우더니 어딘가를 가리키며 “어머, 예쁘기도 해라. 우리 아기, 이것 좀 보자, 정말 예쁘지?” 하길래 엄마 손끝을 따라가 보니 하얀 꽃이 돌 틈에 피어 있었습니다. 아기는 엄마만 쳐다봅니다. 엄마가 아무리 예쁜 꽃을 보여주려고 해도 아기는 엄마만 쳐다봅니다. 문득 신이 있어서 예쁜 걸 가리키며 인간에게 보여주려고 하는데 우리는 신만 쳐다보는 건 아닌지, 혹시 신의 손끝이 가리키는 꽃이 인간이 아닐는지. 오늘 아침 놀이터 풍경이었습니다.”

#3. 김창완은 히트곡이 많습니다. 아무리 김창완 같은 천재라도 좋은 음악이 그냥 술술 흘러나오진 않겠죠. 창작은 고단한 거니까. 그는 다른 사람이 만들고 연주하는 좋은 음악을 ‘남이 해주는 맛있는 밥’에 비유했어요.

“주말 아침 전축을 틀어놓고 음악을 듣다 보면 '해주는 밥이 맛있다' 라는 말이 실감 날 때가 있어요. 어쩜 그렇게 아름다운 멜로디들을 쓰는지, 또 정성스럽고 정성스럽게 연주하는 걸 듣고 있으면 인생의 호사가 별거냐 싶은 기분이 듭니다. 왕이 된 것 같아요. 누가 내 무릎 발치에서 나만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겠어요. 무심히 인생 곁을 스치는 바람 같은 선율이지만 내 생을 채우기엔 충분합니다.”

최진영 작가 인스타그램 @jychoioioi

내가 이렇게 줄줄이 인용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김창완 선생님’(이제부터는 팬심을 표현해야 하니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겠습니다)은 허걱하실 수도 있지만, 사실 나의 감성은 김창완 선생님과 깊숙이 연결돼 있다고 굳게 믿고 있거든요. 나는 ‘내 안의 어린이’를 잊어버리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루하루 충실해야겠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너무 후회하진 말자, 오늘 일을 미루면 내일 하면 된다, 잘 뛰어 놀자.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 친구가 옆에 있다면 우리는 가난하지 않다….

김창완 선생님께 노래 하나 바치고 싶어요. 친구들과 샐러드 먹다가 쓴 노래예요. 동요와 건전가요와 인디 감성을 짬뽕으로 섞은 ‘샐러드 친구들’입니다. 김창완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노래 불러주세요!

샐러드 친구들

(늙은 여자 목소리)

이불은 각자 덮는 거란다

요엔 같이 누워도 이불은 저마다 한 채씩

저마다 따로따로.

저마다 덮자

목화 꽃 피던 기억 솜 이불도

초원의 꼬물대던 추억 양털 이불도

저 멀리 날던 꿈 접은 깃털 이불도

저마다 따로따로 저마다 덮자.

슬픈 기억의 이불은 따로따로 덮자

아픈 기억의 이불은 따로따로 덮자

(젊은 남자 목소리)

아니아니 함께 덮는 이불도 있어요.

같이 숨는 이불도 있어요.

루콜라 아래 숨 쉬던 빨간 토마토

양상추 아래 잠자던 하얀 치즈.

푸른 이불 아래 손 꼭 잡고 있던 친구들.

푸른 이불 아래 푸른 이불 아래

우리는 함께 꿈을 꾸었어

우리는 함께 꿈을 나눴어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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