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뭐길래… 빚쟁이 만들고 성폭행해도 못끊어내 [‘가족’이 달라진다]

노지운 기자 2024. 5. 2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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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 달라진다 - (下) 남보다 못한 가족
이사하고 연락처 바꿔도 찾아와
몰래 카드 만들거나 대출받아도
‘친족상도례’ 규정돼 처벌 피해
성폭행한 친부도 호적엔 그대로
“가족 일에는 국가가 개입 안해”
‘구시대적 현행법’시대 맞춰 변화 필요
그래픽=송재우 기자

“남보다 못한 사이인데 ‘친족’이라는 굴레로 언제까지 고통받아야 하나요.”

어머니를 일찍 여읜 안모(36) 씨는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가정 폭력을 당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아버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멀리 이사를 가고 연락처도 바꿨다. 그때마다 안 씨 아버지는 주민등록등본을 조회해 딸인 안 씨가 사는 위치를 알아내고는 찾아와 돈을 달라고 협박했다. 폭행과 폭언도 함께였다.

안 씨가 스무 살 때였다. 아버지는 그의 동의 없이 보증인으로 딸을 세워 약 3억 원을 빌렸다. 아버지 대신 6년에 걸쳐 빚을 갚았다. 아버지는 또다시 몰래 딸 명의로 신용카드를 발급받았고, 안 씨에게 빚 2000만 원을 안겼다. 그의 20대는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희생됐다. 이후에도 아버지는 딸 명의로 대출을 받으려고 시도했다. 경찰에 몇 번이나 도움을 청했지만 매번 “아버지인 만큼 합의해라. 낳아준 사람인데 기록 남게 하고 싶냐”는 등의 말을 반복했다. 안 씨도 끝내 아버지를 고소하지 못했다. 현재 안 씨는 주민등록 열람 제한 제도를 신청해 아버지가 본인 거주지를 알 수 없도록 했다. 또한 주민등록번호도 변경해 ‘남보다 못한’ 아버지를 철저히 자신의 삶에서 분리했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안 씨 사례와 같이 제삼자가 당사자 동의 없이 당사자 명의로 대출을 받는 것은 사기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친족은 처벌받지 않는다. ‘친족상도례’라고 불리는 형법 제328조 때문이다. 이 조항은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동거가족이 범한 재산죄(사기·횡령 등)의 경우 형을 면제하고 그 외 친족은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친고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노종언 가사 전문 변호사는 “친족상도례 조항 때문에 경찰은 친족인 게 확인되면 곧바로 조사를 중지하고 사건을 종결하고 있다”며 “재판까지 이어지지 않아 통계에도 안 잡히는 만큼 규모조차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 2021년 이성만·이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친족상도례 규정 폐지 법안을 발의했지만 사실상 논의는 중단된 상태다. 오는 29일 21대 국회가 막을 내리면 법안은 자동 폐기될 예정이다.

법률가들은 이런 법이 존재하는 이유로 “가족 간 일에는 국가가 가능한 개입하지 않는다”는 법 정신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윤승진 변호사는 “친족상도례를 악용해 본인의 이득을 취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며 “사회는 변하는데 현행법은 예전 가족의 모습을 상정하고 있어 현대 사회와 맞지 않은 면이 많다”고 말했다. 노 변호사도 “일제시대 때 제정된 법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매우 구시대적”이라고 평가했다.

사회적기업 ‘282북스’가 지난해 12월 출간한 ‘탈가정 청년 에세이’에 따르면 탈가정 1년차인 A(35) 씨도 가족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전국 안 가본 데가 없다. 휴대전화 번호도 여러 번 바꿨지만 그때마다 가족들은 A 씨를 찾아냈다. A 씨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7세 때부터 직장을 다니면서 검정고시를 치렀다. 가족들은 A 씨 앞으로 수없이 대출을 받았다. 일해서 번 돈이 통장에 들어오는 족족 집으로 들어갔다. A 씨가 본인 인생을 가족에게 바치는 동안 A 씨 어머니는 대학교에 진학해 졸업도 하고 학교 친구들과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폭군’이라고 불렸던 A 씨 아버지는 자식들을 몽둥이로 숱하게 때렸다.

가족들과 연을 끊은 뒤 갖은 후유증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어진 A 씨는 병원조차 갈 돈이 없었고 끼니는 편의점 폐기로 버텨야 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A 씨에게 어느 날, 자동차 딜러라는 사람이 전화해 어머니가 A 씨의 장애 등급을 이용해 차를 구매하고 있다고 했다. A 씨는 어머니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고 질긴 인연을 끊어냈다.

‘남보다 못한 가족’이지만 이들의 흔적은 평생 남는다. 친족 성폭력 생존자 B 씨는 8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친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성인이 돼서야 비로소 피해 사실을 인지했다. 본인이 결혼하고 딸을 낳은 뒤에도 아버지로 인해 피해를 입을까 염려돼 지난해 5월 부모에 대해 ‘가족관계단절 확인서’를 내고 부양 의무를 포기함으로써 절연했다. 하지만 확인서를 냈어도 가족관계증명서에는 ‘가해자’인 아버지의 이름이 여전히 남는다. 그는 “호적 자체를 파서 그 사람을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지만 호적 자체를 말소시킬 수 있는 제도는 없더라”며 “평생 가해자와 살아가는 심정이다. 부모는 천륜이라는데 내가 천벌을 받고 있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윤 변호사는 “부모 자식 관계에서 친권을 상실시킬 수는 있지만 현행법상 호적을 말소시켜 가족 관계 자체를 법으로 끊어낼 수는 없다”며 “흔적은 평생 남는다”고 말했다.

노지운·김린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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