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 수난~중종 정릉 파묘까지…'서울의 자서전'

조수원 기자 2024. 5. 2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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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송파구 삼전동.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이민족에게 지배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 한 것이다. 1945년 광복 후 다시 삼전도비를 없애자는 논의 끝에 땅에 묻었으나 1963년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자 정부에서는 역사의 반성으로 삼자는 의미에서 원래 위치했던 곳에서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고, 다시 송파대로의 확장으로 삼전동의 어린이 놀이터 안으로 옮겨놓았다가, 이후 원래 위치와 가까워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해 201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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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서울의 자서전(사진=글항아리 제공) 2024.05.24.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조수원 기자 =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 잠심 롯데백화점에서 성남 방면으로 고풍스러운 비석이 하나 서 있다. 그 유명한 삼전도비다.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이지만 과거 이곳에 삼전 나루가 있었기 때문에 삼전도비로 불린다. 삼전도비의 건립은 청의 일방적인 요구였지만 당시 정세상 거절할 수 없었다. 누구 쓰느냐를 두고도 많은 논란이 뒤따랐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다급해진 인조는 이경석, 장유, 이희일에게 비문의 찬술을 명했다. 인조의 간곡한 요청을 받은 이경석은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여 청의 비위에 맞춰 쓰긴 썼지만, 그 치욕감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손을 후벼 팠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삼전도비는 청일전쟁 후인 1895년 고종의 명으로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해 다시 그 자리에 세워졌다.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이민족에게 지배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 한 것이다. 1945년 광복 후 다시 삼전도비를 없애자는 논의 끝에 땅에 묻었으나 1963년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자 정부에서는 역사의 반성으로 삼자는 의미에서 원래 위치했던 곳에서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고, 다시 송파대로의 확장으로 삼전동의 어린이 놀이터 안으로 옮겨놓았다가, 이후 원래 위치와 가까워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해 201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책 '서울의 자서전'은 조선 건국 이후 한양 천도가 이뤄지던 시점부터 식민 침탈의 한이 서리기까지 서울의 600년 역사가 담겼다.

저자 신병주는 건국대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조선시대사학회 회장부터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문화재청 궁·능 활용 심의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책은 조선을 상징하는 공간인 경복궁부터 창덕궁, 창경궁 등의 궁궐과 왕릉, 조선이 수도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강을 조명했다. 최근 영화 '파묘'와 관련해 서울에도 파묘 후에 옮겨진 왕릉이 있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청계천 공사, 단종이 옥새를 내준 경회루, 용산에 독서당을 세운 성종, 욕망과 흥에 절었던 연산군의 공간, 단경왕후가 왕을 그리워하며 머문 인왕산 치미바위, 중종의 정릉이 파묘되어 옮겨진 사연, 이항복과 꽃구경의 명소 필운대, 송시열과 대명의리론의 공간으로서의 혜화동, 성균관과 그 주변에 얽힌 이야기들을 전한다.

☞공감언론 뉴시스 tide1@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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