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없이 그들만의 열광뿐…김호중의 ‘마지막 콘서트’ 관람기

이정우 기자 2024. 5. 24.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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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기로에 놓인 가수 김호중의 공연을 몇 시간 앞둔 23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KSPO돔(구 체조경기장) 앞에 김 씨의 팬 등 관람객들이 예매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23일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 KSPO돔에 모인 7500명 팬들에겐 가수 김호중은 구속 기로에 선 ‘뺑소니범’도 ‘음주운전 피의자’도 아닌 빛나는 ‘별’이었다. 그렇지만 무대 위 김호중은 빛날 수 없었다. 관객들의 열광적 환호에도 웃지 못했고, 주변의 질시를 이겨내고 자신을 만나러 온 팬들에게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그럼에도 팬들은 공연이 끝난 텅 빈 무대를 바라보며 한동안 “김호중!”을 연호했다. 사과도, 상식도 없이 그들만의 무조건적 열광만 남았다.

음주운전과 뺑소니 등 혐의로 24일 영장실질심사를 받는 김호중으로선 23일 공연이 자숙 전 ‘마지막 콘서트’가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베를린·빈·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인 월드유니온 오케스트라, 세계적 소프라노 아이다 가리풀리나가 무대에 섰지만, 공연의 주인공은 피의자 신분인 김호중이었다. 약 7500명의 관객들은 김호중의 손짓 하나에 열광했고, 더러는 울먹거렸다.

오후 4시에 시작된 현장판매 대기 줄은 공연 시작 시간인 오후 8시까지 이어졌다. 공연 30분 전에도 200여 명이 기다리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주최 측은 현장판매 600석을 합해 이날 약 7500석이 찼다고 밝혔다. 김호중의 팬덤을 상징하는 ‘보라색’은 생각보다 눈에 띄지 않았다. 팬덤 내부에선 공연에 올 때 보라색 옷을 입지 말라는 ‘지령’이 전파된 것으로 전해졌다. 극도로 여성 관객 비율이 높아 공연 시작 전 남성 화장실 용변 칸을 여성 관객들이 점령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김호중은 1부엔 등장하지 않았다. 공연 시작 1시간이 넘어도 김호중이 등장하지 않자 내부는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호중님 안 나오시나. 오늘도 어려우시려나. 안 오면 사고다”란 조바심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가리풀리나의 노래 중에 잡담하는 관객도 점점 많아졌다. 연주가 끝나기 전에 박수를 치는 건 예사였고, ‘넬라 판타지아’ 같은 익숙한 노래가 나오자 흥얼거리는 관객도 있었다.

23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KSPO돔에 ‘월드 유니온 오케스트라 슈퍼 클래식 : 김호중 & 프리마돈나’를 찾은 관객들이 줄지어 서 있다. 뉴시스

2부 시작 후, 객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무대 위에 선 김호중을 발견한 것이다. 빨간색과 검정색이 반반 섞여 있는 남방을 입은 김호중은 오케스트라 뒤편 2층 무대에서 등장했다. 비장미 넘치는 표정으로 1분 가까이 객석을 말없이 응시하던 김호중은 이후 90도로 꾸벅 인사를 했다. 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이크를 집어삼킬 듯 가까이 당겨 노래한 김호중은 입을 앙다문 채 지긋이 입술만 깨물거나 오른쪽 45도 허공을 바라보며 팬들의 연민을 자극했다.

김호중이 이탈리아 칸초네 ‘후니쿨리 후니쿨라’를 부를 땐 클래식 공연으로선 이례적으로 ‘떼창’이 벌어졌다. 별명인 ‘트바로티’의 기원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즐겨 불렀던 곡이다. 마지막인 여섯 번째 곡 푸치니 ‘투란도트’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네순 도르마’)는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김호중은 마지막 클라이맥스 ‘빈체로’(승리하리라)를 외칠 때 꽉 쥔 오른 주먹을 치켜 올렸고, 관객들은 노래 중간임에도 이날 가장 큰 함성으로 화답했다.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치는 가운데, 김호중은 손 인사를 건네며 마지막 무대를 마쳤다.

이날 총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무대에 섰던 김호중은 당초 예정된 가리풀리나와의 듀엣곡은 소화하지 않았다. 가리풀리나는 1부, 김호중은 2부로 사전에 명확히 동선을 구분한 듯한 인상도 줬다. 공연 관계자는 “김호중이 리허설에 참석하지 못해 듀엣곡을 하지 못하게 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월드유니온 오케스트라의 앙코르 곡마저 끝나고, 단원들이 모두 떠났지만, 대다수의 관객들은 발걸음을 쉬이 떼지 못했다. 혹여나 김호중이 한 번 더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인 것 같았다. 텅 빈 무대를 향해 일부 팬들이 “김호중!” 세 글자를 한동안 연호했다.

이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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