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세브르에서 알 수 있는 세라믹의 가치

리빙센스 2024. 5. 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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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르의 세라믹이 전하는 가치

파리의 남서쪽 외곽에 위치한 세브르에는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세라믹 역사를 망라하는 보물 같은 장소가 있다. 세대와 시대를 뛰어넘는 진정한 타임리스가 그곳에 있었다.

. 1875년 지어진 세브르 국립요업소의 전경. ©Gérard Jonca.Courtesy of Sèvres Manufacture et Musée Nationaux.
파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위한 트로피를 만들기 위해 보물로 지정된 2층 규모의 대형 병가마를 5년 만에 가동했다.©Antoine Dubois. Courtesy of Sèvres Manufacture et Musée Nationaux

도예의 도시–세브르와 리모주La Cité de la céramique–Sèvres et Limoges는 프랑스 문화부Ministère de la Culture 산하의 공공기관으로, 세브르국립요업소와 국립세라믹박물관Sèvres Manufacture et Musée Nationaux을 운영한다. 현 요업소의 시초는 1740년, 요업 산업을 적극 육성했던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의 지원으로 파리의 동부 지역인 뱅센Vincennes에 설립한 소프트 페이스트연질 자기 워크숍이며, 박물관의 경우 19세기 초 요업소 소장 알렉상드르 브롱냐르Alexandre Brongniart가 전 세계의 시대별 도자기를 한자리에 모으고자 시도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지난 200년간 박물관이 수집해 온 세라믹 컬렉션은 도자기, 토기, 석기, 테라코타, 스테인드글라스를 포함한 유리 제품으로 구성되며, 무려 5만여 점에 달한다.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의 앤티크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마졸리카 도기, 16세기 말 프랑스에서 생산한 최초의 다색 토기, 약 30개만 남아 있는 이탈리아의 메디치 포슬린, 18세기 초 프랑스 제2의 도시로 번영했던 루앙에서 생산한 디너 세트, 영국의 웨지우드, 그리고 현대의 것들까지 풍성한 아카이브를 자랑한다. 신라시대 토기에서 조선백자와 같은 한국의 세라믹도 300점가량 보관 중인데, 일부는 박물관에 잘 전시되어 있다.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정갈한 모습의 세브르 국립요업소 내부. ©Nicolas Davis. Courtesy of Sèvres Manufacture et Musée Nationaux.

이곳, 요업소가 더욱 소중한 이유는 4가지 유형의 페이스트를 직접 생산하는 유럽의 마지막 남은 공장 중 하나로, 여전히 과거의 제조 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공수한 원재료를 밀가루처럼 곱게 갈아내기 위해 대형 맷돌을 연상케 하는 기계와 해변의 자갈을 활용하는 등 철저히 여러 단계를 거친다. 그렇게 마련한 고운 파우더는 정화된 빗물과 섞고 자석을 활용해 철과 같은 이물질을 제거 및 건조한 뒤, 6개월 이상의 숙성 과정을 갖는데, 완벽하리만큼 정제된 재료는 고품질과 직결되기에 매우 중요하다. 재료가 준비되면 대형 워크숍에서 장인의 손을 만나 비로소 그 형태를 갖추게 된다. 접시의 밑굽이나 조각품의 측면에 제작자의 서명과 제작 시기 같은 식별 가능한 마크를 찍어내는 것은 이들의 오랜 전통이다. 세브르의 마고Le Magot de Sèvres라고 불리는 곳은 마치 보물 창고처럼 18세기부터 사용하던 다채로운 석고 틀을 보관 하고 있다. 덕분에 나폴레옹과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용했던 도자기를 현재에도 원형 그대로 제작할 수 있다.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2층 높이의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19세기 병가마에는 도자기를 향한 누군가의 열정과 애정이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켜켜이 쌓여 있는 듯했다. 병가마 외에도 사용 연료에 따라 최대 1380°C에 달하는 고온 소성용 가스가마와 저온 소성을 위한 전기가마를 사용한다. '세브르 블루'로 불리는 청명한 코발트색은 약 1300°C에서 구워낸다. 장식실에서는 도금 장식을 하고, 인물화나 풍경화 등 과거의 그림을 재현한다. 기름종이에 목탄으로 탁본을 뜨고, 밑그림에 따라 원하는 완벽한 색을 내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데, 100여 가지 색을 구현해 낸다. 자연 채광을 제한하려고 북쪽에 작업실을 마련한 것에서도 철저함을 엿볼 수 있다. 브뤼니사주Brunissage는 금장식이 가미된 호화로운 제품의 마지막 표면 처리를 담당하는 곳으로, 이곳의 책임자 크리스텔 포토푀Christel Potaufeu는 "하나의 접시를 만들기까지 대략 한 달이 소요되며, 금색의 빛나는 정도까지도 섬세히 조절합니다"라고 설명한다. 요업소 내 총 27개의 워크숍에는 최소 3년 이상의 특별 교육을 이수한 120여 명의 도예가가 상주하며 전 과정을 철저하게 분업화해 전문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매년 수천 개의 세라믹을 생산하며 그중 25%는 엘리제궁Élysée Palace과 같은 주요 정부 기관에 귀속되고, 나머지는 박물관 옆 쇼룸과 파리의 갤러리에서 판매한다.

작년 가을, 국립세라믹박물관에서 열린 전시에서는 김수자 작가가 세브르의 장인과 협업한 '연역적 오브제 - 보따리Deductive Object - Bottari'를 만날 수 있었다. ©Benoit Fougeirol. Courtesy of Sèvres Manufacture et Musée Nationaux.
사암을 소재로 가로와 세로 각각 55cm의 정사각형 베이스에 높이 29cm 규모로 완성된 이우환의 '설치 VII'는 물질성, 영속성, 사물의 관계를 탐구한다. ©Gérard Jonca. Courtesy of Sèvres Manufacture et Musée Nationaux.
전통을 자랑하는 블루아 꽃병의 완성 전 모습. 장인의 철저하고 효율적인 작업을 위해 무색 에나멜을 바르면 이처럼 핑크빛을 띄며, 이는 가마에서 구운 뒤 자연스레 사라진다. ©Antoine Dubois. Courtesy of Sèvres Manufacture et Musée Nationaux.

산업화로 맥이 끊긴 여느 국가들과는 달리 수 세기 동안 전통을 이어오되 지속적인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생산량의 반 이상을 현대 창작에 전념하는데, 예술가들과의 꾸준한 협업은 세브르만의 레퍼토리를 풍부하게 한다. 그 시작은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전성기를 대표한 화가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부터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에밀-자크 룰만Émile-Jacques Ruhlmann,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 이우환의 '설치 VIIInstallation VII'2016년, 김수자의 전시 <공허를 감싸다Wrapping the Void>2023년가 포함된다. 올해는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금메달리스트를 위한 새로운 트로피를 준비하며 5년 만에 6개 병가마 중 하나를 가동했다. 100년 전 파리 올림픽에서 프랑스의 도시인 블루아의 이름을 딴 트로피 '블루아 꽃병Vase de Blois'을 만들어 우승자에게 수여했던 관례를 지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파리 국립예술대학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 de Paris 출신의 젊은 아티스트 6명이 디자인에 참여했다. 한편, 세브르 국립요업소와 국립세라믹박물관은 역사적 유산과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부터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연합인 코미테 콜베르Comité Colbert의 회원으로, 2012년에는 살아있는 유산 기업Entreprise du Patrimoine Vivant 라벨을 획득하기도 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부터 2024년 아트 파리에 이르기까지 국제행사에도 꾸준히 참가하는데, 이들이 써 내려갈 역사의 다음 챕터가 궁금해진다.

CREDIT INFO

freelance editor유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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