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추리반 여고생들 [K콘텐츠의 순간들]

복길 2024. 5. 24.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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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추리반〉이 시즌 3으로 돌아왔다. 돌발적인 상황에도 대본 없이 임하는 출연자들의 말과 선택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호러 영화와 같은 연출을 더해 긴장감을 높였다.
시즌을 거듭하며 <여고추리반> 출연자들의 관계는 더욱 견고해졌다. 왼쪽부터 재재, 박지윤, 비비, 최예나, 장도연. ⓒ티빙 제공

2021년 티빙(TVING)의 첫 번째 오리지널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여고추리반〉은 이렇게 시작한다. ‘세라여고’ 옥상에 있는 동아리실 문을 열기 위해 여고생 다섯 명이 함께 암호를 해독한다. 춥고 배고프고 잘 풀리지 않아 머리를 헝클어트리기도 하지만 이들은 눈을 반짝거리면서 ‘한 번만 더’를 외친다. 긴 싸움 끝에 마침내 아늑하고 따뜻한 동아리실 문이 열린다. 다섯 명은 동그랗게 모여 얼싸안고 점프를 하며 아이처럼 행복해한다. 그 순간 시청자인 내게 여고생들의 진짜 얼굴이 보인다. 아나운서 박지윤, 코미디언 장도연, 방송인 재재, 가수 비비와 예나. 세대도 나이도 다르고 친분도 없는 여성 연예인 다섯 명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희열을 느끼며 눈물을 글썽인다.

그러나 그들은 그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곧장 원탁에 둘러앉는다. 전학 온 첫날부터 경찰과 수상한 모의를 하는 교장,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만들어진 ‘S반’, 전학생에게 싸늘한 눈길만 보내는 재학생들, 비밀을 숨긴 채 학생들 주변을 수상하게 맴도는 선생님과 교직원들까지. 그들이 학교를 탐방하며 알게 된 꺼림칙한 풍경과 학생들이 겪은 비극은 비단 허구로 설정된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있는 사건은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라는 박지윤의 말에 따라 이들은 학교 곳곳에서 수집한 단서를 모으고 지도와 암호를 해독한다. 〈여고추리반〉은 이처럼 여성 출연자들 간의 유대감과 ‘여고’라는 공간이 주는 긴장감을 한껏 활용한다. 〈대탈출〉이라는 연출자의 전작 영향 아래에서도 ‘여성 예능’이라는 독립된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거머쥔다.

‘여고’는 언제나 퍼런 조명을 턱 밑에 비추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스산한 여고 귀신이 나타나고, 질투나 시기 같은 사사로운 감정들이 곪아 터지는 비극의 공간처럼 그려지곤 했다. 〈여고추리반〉 시즌 1은 이러한 유구한 클리셰를 서스펜스의 도구로 사용하며 페티시를 걷어냈다. ‘여고’라는 공간을 여성 출연자들이 안전하게 활약할 수 있는 흥미로운 모험의 무대로 바꿔놓는다. 그 안에서 출연자들의 서먹했던 관계는 공통으로 부여된 동급생이라는 설정에 따라 희석되고, 미지근했던 유대감은 학교의 부패한 권력과 맞서야 하는 상황 앞에서 정의롭게 연대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쾌감으로 똘똘 뭉친다. 그 과정에서 출연자를 통제하고 압박하기 위해 조작된 설정들과 ‘여자 고등학교’라는 배경은, 진실을 밝혀내고 부당함을 고발하기 위해 연대를 서슴지 않는 ‘스쿨 미투’ 이후의 한국 여학교를 자동으로 연상하게 만든다. 여성 다섯 명이 학교폭력, 자살, 방관하는 교사들,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는 부패한 권력 등 하나씩 밝혀지는 단서를 통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모습은 불안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용기를 억압하는지 느끼게 만든다.

절대적 지지 받는 ‘렛미모’의 진실은?

2022년 〈여고추리반〉은 시즌 2를 맞으며 추리반 5인방을 새로운 학교로 소환한다. ‘태평여고’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는 ‘렛미모’라는 존재가 있다. 렛미모는 학교 화장실에서 ‘몰카’를 발견한 뒤 그 범인을 찾기 위해 익명 커뮤니티를 개설한다. 그는 학생들을 선동해서 화장실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역몰카’를 제안한다. 범인은 행정실 남성 직원. 진실이 밝혀졌다는 것에 고무된 학생들은 이후 커뮤니티 안에서 작당을 계속하며 학교 곳곳에 무서운 낙서를 하거나 ‘몰카’ 범죄에 미온적이었던 교사들을 테러하는 등 조직적인 기행을 이어간다.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알고 보니 ‘렛미모’가 주동한 ‘역몰카’는 조작된 영상이었으며, 몰카 범죄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범죄자로 지목된 행정실 남성 직원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시청자들은 ‘익명 커뮤니티’에서 선동을 한 여고생들을 ‘진범’으로 추적하기 시작한다. 표면상 익명 커뮤니티로 만들어진 편향적 프로파간다의 위험성에 대한 메시지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배경이 ‘여고’이며 주범이 10대 여학생 ‘렛미모’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경계하는 ‘편향적 프로파간다’는 ‘페미니즘’으로 쉽게 치환된다. 제작진이 아무리 다양한 장치를 이용해 함정과 서스펜스를 만들었다 한들, 결국 그 복잡한 퍼즐이 완성한 그림은 ‘무고죄’였다. 〈여고추리반〉 시즌 2가 방송된 것은 몰카 범죄가 6500건 이상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신당역 살인사건(불법촬영 범죄자가 앙심을 품고 역무원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2022년. 그래서 이 방송을 여성 시청자들이 그저 ‘예능’으로 즐기기는 쉽지 않았다.

〈여고추리반〉은 제작진이 부여한 고정된 설정들보다, 돌발적인 상황에도 대본 없이 임하는 출연자들의 말과 선택에서 더 많은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사건을 추리하며 일기장에 쓰인 작은 낙서와 사진 속 표정까지 읽어내는 40대 출연자 박지윤과 장도연은 ‘여고생’을 연기하고 있지만, 학교 안에서 10대들이 겪는 부당한 일들을 ‘어른’의 모습으로 바라보며 학생들을 보듬는다. 30대 출연자 재재는 추리반의 에이스로, 이들이 감정적으로 사건을 바라보지 않도록 계속해서 가이드를 제시하고 리드한다. 20대 출연자 비비와 예나는 ‘여고’라는 배경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내는 10대 여성 청소년의 문제와 여성 청소년들의 처지에 이입하며 ‘추리 게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저절로 생각하게 만든다. 절차를 지키면서도 약자와 피해자를 우선하는 출연자들의 빛나는 공감 능력과, 서로를 지지하며 관계를 맺는 모습들이 제작진이 의도하지 않은 영역에서 감동과 쾌감을 선사한다.

2024년 5월, 〈여고추리반〉은 연출자를 교체하고 2년 만에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이제 막 2화까지 방영한 〈여고추리반〉 시즌 3은 전 시즌처럼 빈틈없는 세계관을 구현한 뒤, 호러 영화 같은 연출을 더해 긴장감을 높인 모습이다. 과연 이 이야기 속에 제작진이 어떤 메시지를 숨겨놓았을지 두렵고 궁금하기도 하지만, 우선은 출연자들의 플레이에 집중하려 한다. 두 시즌을 거치며 더욱더 견고해진 출연자 간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여전히 모든 여성들의 감정이 응축된 공간인 ‘여고’ 안에서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가진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고추리반〉을 기다리는 건 언제나 설레고, 긴장되는 일이다. 마치 학년이 바뀌고 처음 등교하는 여고생처럼. 방송을 다 보고 나면 다음 시즌을 기다리며 반드시 울겠지. 결코 졸업하고 싶지 않은 여고생처럼.

복길 (자유기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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