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딸이라는 자서전을 쓰고 있다 [책&생각]

한겨레 2024. 5. 2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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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이름은 수엘라 클로데트 리처드슨.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아프리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의 아버지는 리처드슨이라는 이름을 물려주었고, 몰살당한 카리브족의 후예 어머니 수엘라 클로데트 데바리외는 수엘라 클로데트라는 이름을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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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자서전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l 민음사(2022)

여자의 이름은 수엘라 클로데트 리처드슨.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아프리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의 아버지는 리처드슨이라는 이름을 물려주었고, 몰살당한 카리브족의 후예 어머니 수엘라 클로데트 데바리외는 수엘라 클로데트라는 이름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클로데트 데바리외라는 어머니의 이름은 버림받은 아기를 발견한 수녀의 이름이었으므로 여자의 이름은 ‘이름 없음’의 다른 말이고, 스코틀랜드인과 아프리카인과 카리브족이 하나가 된 여자의 정체성은 ‘인종 없음’ 혹은 ‘국가 없음’과 같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러하다. “내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순간 죽었고, 그래서 평생 동안 나와 영원 사이에 서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는 어머니를 잃은 후 이웃 세탁소에 맡겨진다. 첫 번째 유사 어머니인 세탁부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 방임과 학대로 키운다. 일곱 살이 된 여자는 재혼한 아버지의 집에 가게 되는데, 두 번째 유사 어머니인 새어머니는 여자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살해를 시도하기도 한다. 열다섯 살이 된 여자는 상급학교에 진학하려고 도시에 있는 아버지의 동업자 집에 맡겨지는데, 여기서 세 번째 유사 어머니 마담 라바트를 만난다. 생애 처음으로 여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듯 보였던 마담 라바트는 그러나 여자가 자신의 남편에게 사랑을 받고 자신을 대신해 아기를 낳아주길 바랐을 뿐이었다. 무슈 라바트의 아기를 임신한 여자는 낙태를 감행하고 한 번도 어머니를 가지지 못했으므로 어머니 되기 역시 거부한다. 그리고 앞으로 아이들을 낳게 되더라도 누구에게도 어머니가 되지는 않겠다고 선언한다.

책을 읽다 보면 제목의 ‘내 어머니’가 누구인지, ‘자서전’을 쓰는 주체는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여자의 어머니는 여자가 태어나던 순간 죽었기 때문에 자서전을 쓸 수 없다. 아버지의 아내인 새어머니와 여자를 키워준 세탁부 유니스, 마담 라바트 등은 여자의 어머니 자리에 앉기는커녕 그 자리에 심연보다 깊은 공백을 뚫어버린 가해자들이다. 그러므로 ‘내 어머니의 자서전’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모순의 제목이다.

그러나 어머니도 어머니됨도 거부한 여자는 자신의 삶과 맞물린 주변의 삶을 주춤거리지 않고 똑똑히 진술한다. 그 ‘자서전’에는 아프리카 여인에게서 태어났고 카리브족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면서 붉은 머리카락을 물려준 스코틀랜드 아버지와 잉글랜드라는 제국의 식민주의를 숭배한 혐오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이 낱낱이 고발되어 있다. 그 ‘자서전’에는 패배 의식을 품고 낯선 땅에 와서 정원 가꾸기라는 형태의 정복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잉글랜드 출신의 남편을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지 않는가가 솔직히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한 여자의 자서전은 여러 인종과 민족의 수탈사이자 수난사이며, 여러 국가의 정복과 피정복의 역사이고, 여러 여성의 삶과 사랑과 죽음의 기록이기도 하다. 문장 하나하나가 베임 당한 풀포기처럼 비릿한 생의 냄새를 풍기며 동시에 읽는 이의 가슴을 무심히 베는 칼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작가는 조용히 웅변한다. 딸이란 사실 모든 어머니가 쓸 수 있었지만 쓰지 못한, 그러나 여전히 딸의 몸을 통해 쓰는 중인 자서전일지도 모른다고.

이주혜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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