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 한접시에 담긴 푸근한 인심…그리운 추억의 맛

관리자 2024. 5. 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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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회 한 접시에 소주 한잔하려고요."

쓱 훑어본 단출한 메뉴판에는 '모둠회 소 4만원, 대 5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소주 일상'이 미울 법도 한데 어떤 퉁바리도 놓지 않았다.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기어이 '한강 물 커피'와 '천혜향' 3개를 내온 어머니, 그리고 소주 한병 드시고 낮잠에 들었다 막 깬 아버지와 함께 반세기 식당의 역사를 천천히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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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이야기] 반세기의 노부부 횟집
50년간 식당 지킨 80대 동갑부부
군더더기 없이 ‘쥐치회’로만 가득
탱글탱글한 살점에 감탄이 절로
고졸한 식당에 남긴 발자취 영광
경남 고성의 ‘우리식당’에서 내놓은 갓 잡은 쥐치회.

“어머니, 회 한 접시에 소주 한잔하려고요.”

“만원어치 썰어 줄까요?”

쓱 훑어본 단출한 메뉴판에는 ‘모둠회 소 4만원, 대 5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혼자 왔다고 단돈 만원에 활어회를 내주시겠다니.

“그럼 어머니 받는 돈이 너무 적으니 2만원어치 해주세요.”

주문을 받자마자 어머니는 식당 안 출입문 옆에 놓인 수조로 걸음을 옮기더니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쥐치 3마리를 뜰채로 건져 올렸다. 그러고는 곧장 오픈 주방행. 음식 나오기 전 허기를 달래라며 찐 고구마 몇개를 내 앞에 놓고는 거침없이 회를 뜨기 시작했다. 무채 등의 다른 요소가 일절 거들지 않는, 오로지 회로만 채운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접시. 아, 어머니의 쥐치회는 씹는 맛이 정말 남달랐다. 탄탄함의 어나더 레벨, 탄탄함의 어나더 클래스!

임포항을 끼고 있는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의 ‘우리식당’에는 여든 후반의 동갑내기 노부부가 산다. 37살에 시작해 무려 50여년간 식당을 지켰다. 22살에 인근 마을에서 학림리로 시집온 아내는 한복 입고 혼례 치르는 날 남편 얼굴을 처음 봤다. 당연히 신혼여행도 없었다. 식당 일과 더불어 농사짓고 수협 중매인으로도 일했던 고단한 세월. 그래도 자식 농사는 풍년이어서 슬하에 5남매를 두고 10명이 넘는 손주와 2명의 증손주까지 봤다.

어머니의 눈부신 쥐치회를 벗 삼아 연거푸 소주잔을 기울이는데 산책 나갔던 아버지가 식당으로 돌아왔다. 한때 위암 때문에 크게 고생했지만 어제도 친구 포함 세분이서 소주를 5병이나 비우셨단다. 수십년간 누적된 음주의 여파인지 아버지의 얼굴은 불그레했다.

술자리를 함께한 세 어르신의 나이를 합산하면 물경 255살.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되는 한편 250여년의 세월이 녹아 있는 그 ‘최고령 술판’에 합석하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도 피어올랐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소주 일상’이 미울 법도 한데 어떤 퉁바리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새초롬하게 빛나는 ‘샤인머스캣’을 식탁의 두 남자에게 나눠 주고 남편을 위한 저녁상 채비에 나섰다.

나는 불현듯 노부부의 밥상에도 끼고 싶었다. 재빨리 어머니에게 부탁해 쑤기미탕을 받아 들고 두분과 한 테이블에 앉았다.

험상궂은 쑤기미의 살점은 매우 부드러웠고, 강하지 않은 매운탕 국물은 무척 시원했으며, 어머님이 마련한 6가지 반찬에는 ‘할매식당’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지독한 짠맛’이 전혀 없었다. 물론 몸집이 통통하고 눈알이 살아 있는 멸치젓갈은 아주 조금만 긁어내 먹어도 모든 미각을 일거에 진압할 정도로 엄청나게 강렬했지만.

3년 전 11월말경 처음 찾았던 우리식당에 올해 2월 중순께 다시 가봤다. 간판은 그대로였지만 불 꺼진 내부로 들어서니 메뉴판을 뗀 상태였다. 단 한번의 만남을 기억하는 어머니는 1년 전쯤에 식당을 접었다고 했다.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기어이 ‘한강 물 커피’와 ‘천혜향’ 3개를 내온 어머니, 그리고 소주 한병 드시고 낮잠에 들었다 막 깬 아버지와 함께 반세기 식당의 역사를 천천히 추억했다. 이번에도 이곳 생선이 왜 맛있는지를 물었다. 해학이 섞인 아버지의 막힘 없는 답변.

“물이 달라. 고기가 거제에서 일주일이면 임포까지 오는데, 거제에서 맛없던 물고기도 임포 물을 마시면 맛있어져.”

반백살 횟집이 무대에서 퇴장했다. 이 고졸한 식당의 명부에 한번이라도 이름을 올리게 돼 영광이다. 두분의 안녕을 바라고 또 바란다.

노중훈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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