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MZ도 결혼·출산 거부... “치솟는 집값, 경력 단절 싫어” [아세안 속으로]

허경주 2024. 5. 24. 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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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부모 되길 거부하는 청년들
"결혼해도 굳이 아이 가질 필요성 못 느껴"
여성 교육수준 향상… 성차별에 출산 기피
'풍부한 노동력 줄어 성장세 꺾일라' 우려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목요일마다 함께하세요!
지난달 12일 베트남 중북부 탄호아성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다. 탄호아=허경주 특파원

#1. 베트남 호찌민시에 거주하는 프리랜서 개발자 팜밍꽌(28)은 ‘비자발적 비혼주의자’다. 베트남 남성 평균 결혼 연령은 28.3세. 꽌 역시 올해 흔히 말하는 결혼 적령기에 들어섰다. 결혼을 해도, 안 해도 상관없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지만,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과 좀처럼 늘지 않는 통장 잔고, 부모 부양의 부담은 꽌을 비혼주의자로 더 기울게 했다.

꽌의 월평균 수입은 약 1,000만 동(약 53만 원) 수준. 베트남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약 710만 동·38만 원)보다 조금 높지만, 에어컨도 없는 30㎡(약 9평) 방 월세(약 400만 동)를 내고 고향 부모님께 용돈(약 200만 동)을 보내면 홀로 생활할 정도만 남는다.

내 집 마련은 꿈도 못 꾼다. 영국 부동산컨설팅회사 세빌스에 따르면 지난해 7월 기준 호찌민시 아파트 평균 가격은 57억 동(약 3억 원)이다. 꽌이 집을 사려면 단순 계산으로 57년간 월급을 모두 모아야 한다.

꽌은 16일 한국일보에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사는 미래가 선명히 그려지지 않고 가족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줄 자신도 없다”며 “그나마 지금 내 몸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는 수준이라 혼자가 편하다”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라이언 탄(왼쪽)과 코린 차우 부부 모습. 싱가포르 경영대가 홍보물을 통해 부부의 이름을 딴 장학금 수여를 알리고 있다. 싱가포르 경영대 페이스북

#2. 결혼한 지 4년 된 36세 동갑내기 싱가포르 부부 코린 차우와 라이언 탄은 ‘딩크(DINK·맞벌이 무자녀) 부부’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 3월 “인도부터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두바이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많은 커플이 딩크를 선택하고 있다”며 이들의 사례를 소개했다.

차우와 탄 커플은 자녀 없는 부부의 일상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면서 싱가포르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들의 생활이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아이를 낳지 않는 대신 ‘나눔’을 택했기 때문이다. 부부는 2021년부터 탄의 모교인 싱가포르 경영대에 재학 중인 소외계층 학생에게 두 사람의 이름을 딴 ‘라이언 탄 & 코린 차우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탄은 SCMP에 “솔직히 아이가 있었다면 이런(장학금 지급) 결정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우리는 아이 대신 삶에 도움을 주었던 기관,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환원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핼러윈을 앞둔 지난해 10월 베트남 하노이의 한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분장을 뽐내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결혼은 미친 짓? 갈수록 줄어드는 혼인율

동남아시아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줄고 있다. 출생률 세계 최저 수준인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그간 많은 인구와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제 규모를 키워 온 동남아도 저출생 늪을 피하지 못한다.

원인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①결혼하려는 청년이 줄고 ②아이를 낳지 않아서다. 동남아 인구 대국 인도네시아의 경우 2018년 201만 쌍이 결혼했지만 지난해에는 158만 쌍만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인도네시아 통계청은 “최근 10년간 혼인 건수가 29% 감소했다”며 “결혼하려는 사람 수는 매년 꾸준히 줄고 있다”고 설명했다.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경우 2010년대 6, 7건을 유지했던 조(粗)혼인율(인구 1,000명당 혼인 건수)이 2022년에는 5건대까지 떨어졌다. 베트남 통계청은 “2004년 6% 수준이던 미혼 비율이 2019년에는 10%가 넘었다”며 이 수치가 계속 커질 것으로 예측했다. 결혼을 안 하거나 늦은 나이에 하는 추세가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달 12일 베트남 중북부 탄호아성에서 베트남식 결혼식 피로연이 진행되고 있다. 탄호아=허경주 특파원

미래를 함께하기로 했지만 아이는 낳지 않기로 약속한 커플도 늘고 있다. 딩크족에 대한 정부 차원 통계는 없지만, 각국 언론사나 연구소가 실시한 설문조사를 통해 변화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베트남 일간 VN익스프레스가 2030세대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10명 중 6명(61%)은 ‘결혼 후 자녀를 갖는 게 필수는 아니다’라고 응답했다. 싱가포르국립대 정책연구소(IPS)가 올해 1월 시민 2,356명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결혼 생활에서 꼭 아이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문항에 21~34세 응답자 72%는 ‘그렇다’라고 답변했다. 50~64세의 경우 해당 비율이 50%에 그쳤다.

그래픽=이지원 기자

동남아 국가에서는 ‘결혼을 해야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런데 혼인 건수가 줄어든 데다, 결혼을 하고도 2세를 갖지 않으면서 상당수 국가는 ‘베이비 버스트(baby bust·출생률 급락)’에 직면했다.

지난해 싱가포르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은 0.97명으로 아예 1명대가 무너졌다. 인구 유지에 필요한 대체출산율(2.1명)에 크게 못 미친다. 베트남(1.95명) 말레이시아(1.73) 인도네시아(2.10) 태국(1.16) 역시 매년 합계출산율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더 이상 저출생 문제는 선진국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난해 8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한 남성이 아이를 안아 올리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MZ세대, 행복과 아이는 무관 결론”

과거 결혼과 출산을 인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던 인식이 사라진 이유는 뭘까. 많은 동남아 청년들은 ‘경제적 불안정’을 이유로 꼽았다. 임금 인상이 집값·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주택 마련, 양육 등 각종 부담을 피하는 대안으로 비혼 또는 비출산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직장인 자바랄도 레날디(28)는 스트레이트타임스에 “부모님은 아들이 정착해 가족을 꾸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만 결혼을 하려면 내 집을 마련해야 하는데 감당할 준비가 안 됐다”며 “(돈을 모은 뒤) 30대 중반 즈음 결혼을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실제 글로벌 물가 통계사이트 넘베오에 따르면 자카르타의 연소득 대비 주택구매 비율(PIR)은 15.8로 집계됐다. 도시 중산층 가구가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6년 가까이 모아야 자카르타에서 중간 가격 정도 집을 살 수 있다는 얘기다. 베트남 호찌민(35.2) 태국 방콕(29.2) 등 동남아 주요 도시 PIR는 이보다 더 높았다.

싱가포르의 경우 지난해 임대차 계약 월평균 임대료가 5,200싱가포르 달러(약 500만 원)를 기록했다. 싱가포르 주택 임대료는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65% 올랐는데, 이는 런던(24%) 뉴욕(21%) 두바이(17%)를 모두 웃도는 수준이다.

그래픽=이지원 기자

젊은 세대의 가치관 변화도 결혼과 출산을 망설이게 만드는 요인이다. 윌렘 아데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회정책국 수석연구원은 “(젊은 세대는) ‘행복을 위해 아이가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행복과 아이는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린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IPS 조사에서도 2030세대 10명 중 3명은 ‘아이에게 쏟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출산을 원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자녀보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을 더 중요한 삶의 가치로 선택한다는 얘기다.

지난달 22일 베트남 하노이 외교아카데미에서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사무총장과 청년들과의 대화에 참석한 여학생들이 토론에 집중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점차 높아지는 여성의 교육 수준과 사회 진출,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시아 지역의 성차별적 가족 문화 역시 결혼을 기피하게 만든다. 8년 전 결혼한 베트남 여성 꾸인흐엉(35)은 “어린 시절 엄마가 일과 가정 모두를 건사하기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는데, 엄마처럼 살 자신이 없다”며 “일은 일대로 하고, 여성은 가사노동까지 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출산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VN익스프레스는 지난 2월 ‘결혼하고 출산할 의욕이 없는 젊은 여성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여성들이 ‘비혼+비출산’을 선택하는 분위기를 전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직업을 갖고 인생을 즐기던 여성들이 결혼으로 일에 대한 야망이 꺾이고 임신과 출산의 불편을 겪게 된다. 또 전통적인 남성 선호, 남편과 아내 사이 불공정한 관계는 여성들이 결혼하는 것을 꺼리게 만든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헤드헌터로 일하는 24세 여성 레하짠(오른쪽)이 직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짠처럼 동남아시아 지역 여성들의 교육 수준과 사회 진출이 높아지면서 자녀보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을 더 중요한 삶의 가치로 선택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짠 본인 제공

”혼인율 줄면 중진국 함정 빠져”

청년들의 결정에 골머리 앓는 쪽은 기성세대와 정부다. 개발도상국인 동남아 국가는 지난 20여 년간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에 토대를 둔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경제발전 기틀을 마련해 왔다. 머릿수를 동력 삼아 더 높은 도약에 나서야 하는 시점에 인구가 늘지 않아 노동 공급에 차질을 빚게 됐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국가가족계획조정국(BKKBN)은 “혼인율이 감소하면 인도네시아가 2045년 독립 100주년을 맞을 때까지 선진국이 되겠다는 목표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며 “중진국 함정을 피하려면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있을 만큼 인구가 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젊은이들이 너무 늦게 결혼하거나, 독신 생활을 하거나, 자녀를 갖지 않는 것은 국가 인구의 질과 양을 위협한다(베트남 매체 푸느비엣남)”는 우려도 이어진다.

다만 뾰족한 해결책은 없다. 가족을 꾸리길 거부하는 젊은 층을 향해 쓴소리를 내놓거나, 아이를 낳으면 돈 몇 푼을 쥐여주는 게 대책의 전부다. 한국을 덮친 ‘인구 쇼크’가 수년 뒤에는 동남아에서 재현될 수 있는 셈이다.

탄호아·하노이=글·사진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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