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상처 입은 치유자

경기일보 2024. 5. 2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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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두영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지난달 글에서 필자는 ‘내 전존재보다 더 큰 사랑에 안기면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신과의 화해가 일어난다’고 했다. 오늘은 그 다음 단계에 대해 나눠본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저마다의 역사가 있고 그 안에는 당연히 상처와 아픔, 부서진 순간들도 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무덤덤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 대부분은 정말로 자유로워져서 그런다기보다는 그저 잊고 살아서 그렇거나 혹은 마음이 메마르면서 그리 되는 경우도 많다. 어떻든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상처는 우리를 본연의 모습에서 뒤틀어 버리기도 한다. 신체의 부상만 떠올려 봐도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운동 중 한쪽 팔을 부상당하면 팔이 낫고 나서도 무의식적으로 부상당했던 팔을 멀쩡한 팔보다 덜 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신체의 불균형이 생기기도 한다. 이처럼 상처와 아픔, 그리고 그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은 많은 영향을 남긴다. 몸도 그러한데 마음의 상처야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상처를 두려워하며, 자신에게 상처가 있다는 사실까지도 부정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연약한 존재, 부서지기 쉬운 존재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데 어떤 이들은 그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상처와 연약함을 직면하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상처를 다른 이를 위한 쉼터로 열어주기까지 한다. 그는 자신의 상처로 다른 이의 상처를 안아준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톨릭의 아주 오래된 영성을 현대 영성가 헨리 나우웬 신부가 재조명하면서 쓴 표현이다.

가톨릭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는다. 그런데 정작 부활한 예수에 대한 가톨릭의 증언은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부활은 결국 신성(神性), 즉 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부활한 예수는 힘과 권세가 넘치는 완전무결한 모습이어야 할 텐데, 가톨릭은 오히려 부활한 예수를 ‘상처를 지닌 모습’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상처를 보여준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그토록 무력하게 죽었던 바로 그 사람임을 인정한다. 그는 자신의 상처와 부서짐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승리의 표지요, 용서와 사랑의 표지, 공감과 연대의 표지로 만든다. 제자들은 예수의 상처에서 용서와 화해, 치유와 사랑을 체험하고 용기와 믿음을 얻는다.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53, 3)

실제로 우리는 자신의 상처로 다른 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한다. “당신의 아픔을 다 안다고 할 순 없겠지만 내게도 비슷한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당신의 아픔에 함께 있겠습니다.” 그의 상처 안에서 누군가는 위로와 용기, 믿음과 희망을 얻는다.

가톨릭의 오래된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애써 십자가를 지려고만 하지 말고(혹은 십자가에서 도망치려고만 하지 말고) 십자가를 안고 가라. 그러면 어느새 십자가가 너를 안고 갈 것이다.” 과거의 상처든 미래의 걱정이든 무엇이든 거기서 도망치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 모든 것은 결국 부활의 여정이 될 것이며 언젠가 그것은 내 구원의 다리가 되고 누군가의 쉼터가 돼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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