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서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 핀란드, 중립 유지할 수 없었다”

김지원 기자 2024. 5. 24.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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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제15회 ALC 폐막
22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만찬에서 마린 전 핀란드 총리가 연설을 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한국이야말로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권위주의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공격적인 이웃’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게 어떤지 가장 잘 알 겁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고 중립국 지위를 버리더라도 핀란드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됐어요.”

22~23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5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 만찬 연설자로 나선 산나 마린 전 핀란드 총리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유럽 안보 시스템의 핵심 원칙과 약속을 깨뜨렸다”며 “러시아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주 진영 국가들이 더욱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가치와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수호해야 한다”고 했다.

마린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34세 나이로 총리 자리에 오른 핀란드 역사상 최연소 총리였다. 코로나 팬데믹 대응을 지휘했고,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곧바로 핀란드의 나토 정식 가입을 추진했다. 그의 결단을 토대로 핀란드는 지난해 4월 나토의 31번째 회원국이 됐다. 마린 전 총리는 ‘젊은 여성 지도자’라는 선입견에 갇히지 않고 국가 안보를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린 강인한 리더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핀란드의 나토 가입이 확정된 다음 날 다른 국내 이슈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마린 전 총리는 당시 핀란드의 나토 가입에 대해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에 살면서 핀란드가 중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고 했다.

마린 전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잔인한 폭력 행위였고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우리(핀란드)는 충격받을 수밖에 없었다”며 “러시아가 넘지 못할 유일한 국경이 무엇인지 자문해보았을 때, ‘나토 국경’밖엔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어 “처음에는 핀란드 국민과 정치인들도 75년간의 중립국 지위를 버리고 나토 회원국이 되는 걸 반대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계속 이어지면서 여론도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연사로 무대 오른 마린 前 총리 - 22~23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5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서 만찬 연설자로 나선 산나 마린 전 핀란드 총리가 핀란드의 나토 가입 추진 배경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왼쪽은 연설 후 대담을 진행한 조주희 미 ABC뉴스 지국장. /김지호 기자

그는 이날 서방국가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 지나치게 안일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마린 전 총리는 “서구 국가들이 권위주의 정권이 권력보다 경제성장을 우선시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순진했다”며 “(서방이 믿었던) 상호 의존성은 러시아가 에너지 수출을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했다. 실제로 2021년까지 유럽연합(EU)의 전체 천연가스 수입 물량의 45%가 러시아산(産)이었고, 전쟁 이후 러시아는 유럽으로 연결되는 파이프를 통한 천연가스 공급을 거의 끊다시피 하며 유럽을 압박해왔다. 마린 전 총리는 “에너지 공급의 대부분은 우리와 다른 가치관과 정치 체제를 가진 국가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의에만 의지할 수 없다”며 “결국에는 우리(민주 진영) 국경 내에서 새로운 채굴 기회를 모색하고, 대체재를 개발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연설장에서 한 대학생이 “한국과 핀란드 같은 작은 나라들은 어떻게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나”라고 묻자, 마린 전 총리는 “민주주의 국가로서 리더십을 일깨워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강한 미국이 필요하고 강한 유럽이 필요한 만큼, 한국처럼 규칙에 기반한 질서를 수호하는 강력한 아시아 민주주의 국가도 필요하다”며 “그렇지 않으면 항상 국제 질서에서 밀려나게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민주 진영)의 가치와 방식이 우세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자유 경제와 글로벌 무역이 민주주의, 인권의 가치와 결합되면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고 행복해지는 사회를 만들어낸다”며 “우리는 그 모델을 자랑스럽게 옹호해야 한다”고 했다.

마린 전 총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성 리더십과 성평등 사회 건설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핀란드는 한때 가난한 나라였지만 북유럽 복지 모델과 여성 권리 신장을 바탕으로 성공을 거뒀다”고 했다. 2019년 총리 취임 후 첫 내각을 발표했을 때 그는 장관 19명 중 12명을 여성으로 임명했고, 연립정부 파트너 정당 4곳의 대표도 모두 여성이었다. 마린 전 총리는 “성평등은 노동력 참여와 혁신을 증가시켜 경제성장에 기여하고, 의사결정의 다양성은 더 넓은 범위의 요구를 해결하는 더 나은 정책으로 이어진다”며 “결국 여성의 권리 신장은 개인과 사회의 안녕을 증진함으로써 사회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어 그는 “현재 유엔 회원국 중 단 28국의 정상만 여성”이라며 “더 많은 여성이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유연한 육아휴직 제도’를 해결책 중 하나로 소개했다. 마린 전 총리는 “핀란드에선 원내 여성 정당 지도자 중 3명이 재임 중 자녀를 낳았고, 육아휴직을 썼다가 복귀하기도 했다”며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육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정착돼 있다”고 했다. 또 “핀란드의 젊은 남성들은 육아휴직을 통해 아이를 기를 수 있다는 점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육아휴직은 여성이 일할 기회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아이의 성장 과정에 아버지가 참여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성평등한 제도”라고 했다.

그는 이어진 조주희 미 ABC뉴스 지국장과의 대담에서 “한국의 젊은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여러분은 매우 유능하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며 “여러분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우리 사회는 여성 없이는 기능할 수 없기 때문에, 여성도 남성과 함께 동등한 가능성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산나 마린 前 핀란드 총리

산나 마린 전 핀란드 총리는 2019년 핀란드뿐 아니라 당시 세계 정상 중 최연소 나이(34세)로 총리 자리에 올랐다. 재임 시절 자국의 나토 가입을 이끌어냈고, 성평등·기후위기·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진보적인 개혁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그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던 지난 2022년 8월 또래 정치인·연예인들과 파티를 벌인 영상이 유출되면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현재 핀란드 사회민주당 대표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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