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연기 대신하지만 ‘인형’의 마법에 빠져드네

이태훈 기자 2024. 5. 2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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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속 인형 ‘퍼핏’의 세계
그래픽=양진경

“‘찬란하다’란 말로 시작해서 ‘아름답다’로 끝나는 /천개의 단어들로 이루어진 나의 세상(…) /천개의 단어와 뜻을 열심히 조립하면 /내 맘 속에 있는 얘기 다 꺼낼 수 있을까….”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천개의 파랑’ 무대 위, 경마장 기수 로봇 ‘콜리’가 노래한다. 실제 노래를 부르는 것은 로봇 ‘콜리’의 퍼핏(puppet·공연에 사용되는 다양한 인형)을 움직이며 ‘콜리’ 역을 연기하는 배우. 그런데 무대 위 이야기와 노래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 순간 배우는 퍼핏 속으로 녹아드는 듯 사라지고 퍼핏만 살아 움직이는 순간을 만난다. 세련된 퍼핏이 관객의 상상력을 통과하면, 인간 배우가 갖는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무대 위에 생겨나는 것이다. 무대 위에 펼쳐지는 퍼핏의 마법이다.

그래픽=양진경

◇관객 사로잡는 퍼핏의 마법

매력적 퍼핏들이 등장하는 공연 두 편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상업 공연에서 보기 힘든 드물고 귀한 시도다. ‘천개의 파랑’은 SF작가 천선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선 브래드 피트 주연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로 널리 알려진 피츠제럴드의 단편 소설이 원작인 뮤지컬 ‘벤자민 버튼’이 공연 중이다. 둘 다 국내 순수 창작 초연 작품.

‘천개의 파랑’의 배경은 사람 대신 로봇이 경마 기수를 맡는 미래. 퍼핏은 CG 없는 무대 위에서 경주마의 경주나 기수 로봇의 움직임을 라이브로 표현한다. 실수로 심어진 단어 1000개 분량의 학습 칩 덕에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된 기수 로봇 ‘콜리’와, 잘 뛴다는 이유로 혹사당해 겨우 3살에 관절이 다 닳은 경주마 ‘투데이’는 둘 다 새로 사는 편이 싸다는 이유로 곧 폐기·안락사 처분될 처지. 가난한 집안의 로봇 천재 소녀 ‘연재’와 장애인 언니 ‘은혜’가 콜리와 투데이를 구하려 한다.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천개의 파랑'. /서울예술단

‘콜리’ 역 배우는 키 160㎝의 퍼핏 ‘콜리’의 머리를 움직이면서 대사와 노래를 소화하고, 인형사 두 사람이 퍼핏의 몸을 움직인다. 퍼핏이 로봇 콜리의 이미지라면, 배우는 그 감정과 영혼을 담당하는 셈. 몸 안에 두 명과 몸 바깥에 한 명, 총 세 명의 인형사가 만들어내는 경주마 ‘투데이’의 움직임도 우아하다. 26일까지, 3만~9만원.

◇시간을 거슬러 가는 5개의 퍼핏

‘벤자민 버튼’에서 주름 덩어리 같은 노인 상태로 태어난 벤자민은 나이 들수록 더 젊어지고, 신체의 시간이 세상의 시간과 거꾸로 흐르는 평생 동안 9세에 처음 만났던 재즈 클럽 가수 소녀 ‘블루’를 사랑한다. 재즈와 금주법의 시대인 1920년대 미국이 배경인 만큼 풍성한 빅밴드 재즈와 블루스 넘버가 매력적이다.

뮤지컬 '벤자민 버튼'. /EMK뮤지컬컴퍼니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의 CG를 대신해 거꾸로 가는 벤자민의 노화 과정을 표현해내는 이 뮤지컬의 퍼핏은 경이롭다. 휠체어에 앉은 노인 외모의 아홉 살 어린이부터 콧수염 기른 중년 아저씨, 소년의 외양을 가진 노인 등 각 연령대를 표현한 5개의 퍼핏을 벤자민 역 배우를 중심으로 앙상블 배우들이 함께 움직인다. 퍼핏을 제작한 문수호 작가는 “휠체어를 탄 노년 모습이지만 실제 나이는 9살인 ‘노인 벤자민’의 경우 미완성과 낡음의 경계에 있는 듯 모호하게 디자인하는 등, 나이별로 콘셉트가 확실했다”며 “가장 무거운 노인 벤자민이 20kg, 움직임이 많은 중년은 10kg, 청년은 13kg 등으로 원활한 움직임을 위해 퍼핏 무게를 줄이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고 했다. 내달 30일까지, 7만~12만원.

/EMK뮤지컬컴퍼니

◇부산엔 유럽 극단의 퍼핏 ‘모비딕’

24일 개막하는 부산국제연극제의 개막작도 인간 배우와 퍼핏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유럽 극단 플렉시스 플레어의 ‘모비딕’. 인간 크기 퍼핏 ‘에이허브’ 선장의 비주얼은 입이 떡 벌어진다.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하늘연대극장 무대에 오르는 공연은 24일 오후 7시30분과 25일 오후 5시, 딱 두 차례.

24일 개막하는 부산국제연극제 개막작, 유럽 극단 플렉서스 폴레어 (Plexus Polaire)의 '모비딕'. 에이허브 선장은 퍼펫, 주변의 가면 쓴 인물들은 인간 배우들. /부산국제연극제

영국 웨스트엔드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는 혼을 담은 퍼핏이 세트·미술·조명·음향 등 첨단 무대 기술과 만났을 때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소설·영화 ‘파이 이야기’를 옮긴 이 연극 무대의 태평양을 떠도는 구명 보트 위엔 소년 파이만 인간 배우일 뿐 호랑이, 오랑우탄, 하이에나, 얼룩말이 다 퍼핏이다. 영국 더타임스는 “당신이 여전히 연극을 믿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위대한 승리”라고 극찬했다.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태평양을 떠도는 구명 보트 위에서 소년 '파이'가 호랑이 '리처드 파커'에 맞서 싸우는 장면. 캐나다로 가는 배가 난파된 뒤 가까스로 구명 보트에 올라탄 소년 '파이'는 인간 배우가, 호랑이와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 등 다른 동물들은 모두 인형사(perppeteer)가 움직이는 정교한 인형 퍼핏이 연기한다. /사진가 매슈 머피, 이번 짐머먼

뮤지컬 ‘라이언킹’의 거대한 퍼핏들 역시 아프리카 초원의 대형 동물들의 춤을 라이브 액션으로 구현해낸 무대 예술의 위대한 성취였다. 1997년 이 뮤지컬이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을 올렸을 때 뉴욕타임스의 공연 평론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문이다.

“당신은 갑자기 처음으로 서커스 구경을 갔던 네 살 아이로 되돌아간 것을 깨닫는다. 기린, 코끼리, 하마,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움직이는 새들…. 이국적인 동물들의 행렬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은 보통 도시 서커스에서 볼 수 있는, 반짝이 옷을 입은 피로에 지친 짐승이 아니다. 공기와 빛, 어쩌면 신성(神性)을 지닌 플라톤적 존재라 할 수 있는 동물들이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당신이 에덴 동산으로 가는 문이 열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곳, 브로드웨이 42번가의 극장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당신은 지금 원시의 낙원처럼 보이는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뮤지컬 '라이언 킹'에서 초원의 왕의 아들 사자 '심바'가 태어나는 '생명의 순환(Circle of Life)' 장면. /사진가 매슈 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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