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밤비 내리는 우등고속버스

유석재 기자 2024. 5. 2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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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우드픽

(얼마 전 외장하드 한 구석에서 이 글을 찾아냈습니다. 이 글을 쓴 지도 사반세기가 가까운 듯합니다. 아, 얼마 전 젊은 인턴 사원들에게 뭔가 말하던 중 ‘사반세기’라고 했더니 200년인 줄 알더군요. ‘반세기=50년’, 거기에 ‘4×50년=200년’이라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은 무척 논리적입니다.)

군산(群山)에 간 적이 있습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 했던 곳이었지요. 인연의 끈이 닿아 본 적 없는 곳이었지요. 단 한번 스치듯 지나쳐버린 이후로 다시는 발길을 돌릴 일이 없었던 곳이었지요.

산(山)들이 모여[群]있는 곳. 지도 위에서 바라본 그곳은 마치 깊은 꿈속의 망연한 수묵화처럼 느껴졌어요. 물 듬뿍 젖은 도열(堵列)한 섬들의 풍경들, 주위는 온통 안개가 감싸고 있는, 산봉우리 그대로 바닷물에 잠겨 군도(群島)가 돼버린.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면, 섬 사이를 떠돌고 있는 물기어린 여백들 그 어딘가에 이 답답한 청춘의 답이 있을지도 몰라. 제 나이 스물 넷이었습니다. 인생을 너무 오래 살았어, 앞으로의 삶은 여생(餘生)이겠지.

난 이대로 그냥 멍청한 화석이나 박제가 될 지도 몰라.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그곳 포구에서 한 발짝만 내밀면.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푸른 물결에 서서히 밀려가듯, 내 몸은 섬으로 다가가겠지. 이런 세상에, 저 섬의 이름들 좀 봐. 선유도(仙遊島), 무녀도(巫女島), 미도(尾島)…. 그래, 환상이란 것이 세상에 그 그림자를 내밀고 있다면, 저 섬들을 멀리 떠나서 존재하지는 않을 거야. 지금 와서 생각하면 머릿속을 떠돌던 그 모든 언어들은 그야말로 구상유취(口尙乳臭). 라디오에서 ‘사는 게 뭔지’가 들려 오던 그해 여름, 전 도저히 돌아오고 싶지 않을 그런 곳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짐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동행할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군대 간 친구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길을 달리 해 한번 어긋난 어린 시절 풋사랑의 곰삭은 잔해는 의식 속에서 턱없이 과장돼 마냥 머릿속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래 기차를 타야겠지. 하지만 한여름 휴가철, 게으른 방랑자에게까지 돌아갈 표 한 장은 그 어디에도 없어 보였습니다.

저녁 일곱 시 반, 강남 터미널에서 우등고속버스를 탔습니다.

비가 내렸습니다. 날은 금세 어두워졌습니다. 창 밖을 내다봤습니다. 빗방울 연신 쏟아지는 어두컴컴한 사각의 공간에 길 잃은 청년의 얼굴이 비쳤습니다. 바깥은 분간할 수 없이 암울했습니다. 그래, 차라리 그치지 말아다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쏟아지는 설움만큼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왜 혼자 내려가려고 하는 거야! 아는 이 한 명 없는 그곳에. 이런 멍청한… 바로 그때였습니다.

“쩝… 쩝….”

순간, 군침이 돌았습니다. 한 신문사의 영화 담당 기자는 그로부터 5년 뒤 ‘시네마레터’라는 고정란에서 이와 같은 언어를 통해 인생의 미묘한 지점들을 탁월하게 짚어내고, 저는 이 글을 읽고 불현듯 그 순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르투로 립스테인의 ‘짙은 선홍색’에서 여자 사형수는 처형되기 앞서 밥그릇을 깨끗이 비웁니다. 송능한 감독 ‘넘버 3′의 깡패 태주는 깁스를 한 채 쫓기면서도 나뒹구는 사과를 집어먹으며 도망치지요. 스탠리 투치의 ‘빅 나이트’에서는 모든 꿈이 사라진 잔인한 아침에도 형제가 묵묵히 오믈렛을 만들어 먹습니다. …우리 절망은 왜 이리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걸까요. 왜 우린 자식이 죽고,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이 떠나가도 끝내 허기를 느끼며 뭔가를 입에 넣어야 하는 걸까요….”

소리는 안쪽 옆자리에서 들려왔습니다. 뭘 먹고 있는 것일까. 그때까지도 옆자리에 누가 앉았는지는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문득 그날 아침에 눈을 뜬 이후 아무 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허탈함과 아픔과 처량함이 뒤섞인 허기가 밀려왔습니다. 버스가 휴게소에 멈춰 서려면 아직도 한 시간 반쯤 더 가야 할 텐데. 저는 흘깃 고개를 돌렸습니다.

저와 비슷한 나이거나 아니면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여자가 멍한 모습으로 쥐포를 손으로 조금씩 찢어 입에 넣고 있었습니다. 긴 머리에 작은 몸집, 물기 어린 두 눈은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듯 앞 의자 광고문 앞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다 말다 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입에 넣은 쥐포를 씹는 행동만큼은 웬지 단호해 보였습니다. 마치 그 순간 쥐포라도 열심히 먹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아마 집이 군산인가 봐. 사실상 아무런 이유 없이 무작정 그곳을 찾아가는 나보단 훨씬 낫군 그래. 여전히 비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저는 등을 의자 깊숙이 파묻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좀, 드실래요?

잠시 의아한 듯 그 여자를 바라보던 저는 이내 반응을 보였습니다.

―네.

쥐포 몇 조각을 주저 없이 받아 든 저는 다시 창 밖을 응시했습니다.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조각을 베어 무는 순간, 울컥, 눈물이 치밀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알 수 없었습니다. 차 안은 그다지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차 앞 천장에 걸어놓은 TV에선 ‘홍금보의 범보’라는 비디오가 흘러나왔습니다. 홍금보와 임자상이 모처럼 함께 주연을 맡았고 무명 시절의 양자경이 단역으로 나오는 이 영화에선 대사가 나오지 않는 순간이 퍽 드물었습니다. 문득 그 중국어조차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달려가는 듯 서 있는 듯, 시간은 진공 속에서 멈춰선 듯했습니다. 여태껏 살아온 그리 길지 않았던 삶 속의 어리석은 순간들이 번갈아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리석음, 어리석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을 그 수줍고 안절부절못하고 우유부단하고 안타까웠던 순간들의 연장(延長). 떠나기 전, 왜 소주병 들고 홀로 석탑 아래 벤치에서 눈시울 적셨는지.

‘채근담(菜根譚)’은 이렇게 말합니다.

圖未就之功, 不如保已成之業; 悔旣往之失, 不如防將來之非.

(도미취지공, 불여보이성지업; 회기왕지실, 불여방장래지비.)

아직 이루지 못한 공을 도모함은 이미 이룬 업(業)을 보전함만 같지 못하고, 지나간 상실을 후회함은 다가올 잘못을 막음만 같지 못하다.

그러나 지친 젊음에게 이미 이룬 업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고, 불투명한 미래는 다가올 잘못 따위를 내다볼 수 있을만한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는 듯했습니다. 모든 걸 잊고 새로 시작할 수만 있다면. 그 구토와 명정(酩酊)과 개똥철학의 못난 시간들을 저버릴 수만 있다면. 시간은 꽤 흘러 있었습니다. 버스는 이미 전라도 경계를 넘어선 듯했습니다.

―저...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조심스럽게 다시 말문을 열었습니다.

―군산관광호텔이 어딘지 아시나요?

제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며 그 여자는 또박또박 물어보았습니다. 두 눈에 맺힌 물기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했습니다. 왠지 모를 간절한 목소리였습니다. 제가 알 턱이 없었습니다.

―모르겠는데요.

그녀는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고, 두 번 다시 제게 말을 건네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걸 왜 내게? 저는 흠칫 놀랐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호텔이 어딘가를 묻다니. 혹시 평소 원래 그 호텔에 갈 일이 많은 그런 여자는 아닐까? 내일 아침 내게 뭔가 요구할 생각을 가지고 그런 말을 물어본 것은 아닐까. 허허 참, 어처구니 없는 생각일 거야.

비는 계속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듯,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습니다. 곧 도착하겠지… 그리고 숙소를 찾자마자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스르르 눈을 감겠지.

버스는 종점에 닿았습니다. 한 발짝 먼저 차에서 내린 그 여자는 우산을 펴 들더니 쏜살같이 뛰어갔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구두에 밟힌 포도(鋪道)에서 물이 튀었습니다.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쯤 주위를 둘러보던 저는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터미널 바로 옆에 큰 건물 하나, 모든 창문마다 불이 꺼진 채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군산관광호텔이라 씌어진 간판이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아마도 휴업 중인 듯했습니다. 저 호텔이 저기 있다는 걸 그 여자는 몰랐던 것일까. 불 켜진 방이 없다는 것조차. 그제서야 전 잠시나마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나를 쳐다보게 하는 나

나를 의심하게 하는 나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나

나를 잃어버린 나

그리하여 나는 사랑이 아니다.

―다니카와 순타로(谷川俊太郞) ‘사랑에 대하여’ 중

그 도시에서 있었던 그 후의 일들은 뚜렷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적산(敵産)가옥과 유흥가가 뒤섞인 골목길을 헤매다 한 낡은 여관방에 들었고, 다음날 날씨가 깨끗이 개자 부두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내리쬐는 한여름의 햇볕과 MT 온 어린 학생들의 되바라진 웃음들, 짐보따리 머리에 이고 뭍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고단한 삶의 흔적들을 빼고 나면. 지도에서 그렇게도 비범한 환영(幻影)을 연상시켰던 그 바다와 섬들은 그저, 도시의 어느 구석과 마찬가지로 말없는 사람들이 오고가는 심상한 공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섬의 포구에 내렸던 저는 두어 시간만에 다시 뭍으로 나오는 배를 탔습니다. 남은 것은 저 채근담의 한 줄기 잠언(箴言)과 새까맣게 그을린 양쪽 팔뚝 뿐이었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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