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노잼 도시’에 대한 변명

이영관 기자 2024. 5. 2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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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친구의 근황을 접하고 놀란 적이 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 수년 동안 직장을 몇 번 바꿨는데, 이젠 아예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타향살이에 지쳐 보였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놀랐던 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떠납니다’라며 그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장문의 글이었다. 청춘에 마침표를 찍는 듯한 결연함, 실패를 고백하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늦은 밤 휴대폰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친구는 왜 귀향을 고백해야만 했을까. 그와 겹쳐 보이는 일이 최근 있었다. 구독자 300만명 넘는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이 경북 영양군을 배경으로 올린 영상이 지역 비하 논란에 크게 휩싸였다. 출연진은 버스 터미널에선 진보·청기 등 지명을 보고 “중국 같다” 말하고, 특산품인 젤리 맛은 “할머니 살을 뜯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결국 이들은 사과문을 올리고 해당 영상을 비공개 처리 했다. 분노는 계속되고 있다. 사과문에는 4일 만에 댓글이 2만8000여 개 달렸다.

이 유튜버들의 발언을 옹호할 생각은 절대 없지만, 그들만의 문제일까. 이번 논란은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지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이미 젊은 세대에 어느 정도 팽배해 있다. 한창 일해야 할 나이, 서울을 떠나는 게 인생의 단절로 여겨지곤 한다. 직장이나 벌이가 여의치 않아도, 무작정 상경한 이들이 주변에 여럿이다. 비슷한 처우를 제공해도, 각종 시험에서 수도권 지역 합격이 비수도권보다 어려운 이유다. 서울에 집을 장만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닥을 찍었는데 오히려 서울에서 인생을 꿈꾸는 청년은 늘고 있다.

노잼 도시. 최근 젊은 세대가 지방을 일컫는 이 단어를 곱씹어 본다. 통상 문화·예술 인프라가 부족해 특색이 없는 도시를 가리키더니 이젠 그렇지만도 않다. 광역시 단위의 도시도 전국 곳곳에서 노잼 도시임을 자처하는 곳이 많다. “그 도시는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재미없는 곳이야”라며 손쉬운 답변을 내놓는 셈이다. 서울에 비하면 재미가 없다는 자조 섞인 말인 동시에, 모든 것에서 즉각적인 재미를 찾는 세태가 반영된 결과다.

한 노잼 도시에서 며칠 전 선물이 왔다. 지인이 튀김소보로를 한아름 사 왔다. 그 덕에 이 빵이 최근 의도치 않게 입방아에 오르내린 것도 알게 됐다. 서울역 인근에서 팝업스토어를 연다는 소식에 마니아들 사이에 빵을 살 수 있단 기대가 퍼졌는데, 알고 보니 빵은 전시만 한다는 것. 서울에서는 빵을 보기만 한 다음, 기차를 타고 직접 가라는 모양새다. 헛웃음이 나왔다. 브랜드의 판매 철학을 듣고서야 이해가 됐다. 원래 다른 도시에서는 빵을 팔지 않는다고 한다.

그 도시는 앞으로도 ‘노잼 도시’란 수식어를 벗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빵이 유명한 노잼 도시 정도로 남을 테다. 그러나 빵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이가 그곳을 찾을 것이며, 누군가는 그곳에 사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도시에서 대단한 재미를 찾지 못해도, 작은 재미만으로 살 만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 셈이다. 논란이 된 유튜버들의 발언이 다시금 생각난다. 그들은 식당 메뉴가 “특색 없다”고 말했지만, 누군가에겐 작은 재미를 주는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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