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의 정치 포커스] 용산·여의도 정면충돌과 ‘거부 민주주의’

박성민 정치컨설턴트 2024. 5. 2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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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 채 상병 특검법 거부권 행사에
민주당은 “탄핵 열차 시동” 공식 거론
거부권도 탄핵도… 남용 순간 자신 찔러
여당의 총선 참패도, 야당의 대선 패배도
중도층 지지를 잃어버린 게 핵심 원인
지지층 요구대로 하다간 또 위기 부를 것
일러스트=이철원

지난 4월 29일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회담은 ‘평화 회담’이 아니라 (더 큰 전쟁을 예고하는) ‘선전 포고’ 같은 분위기였다. 이재명 대표는 15분짜리 포고문을 공개적으로 읽었고, 윤 대통령은 비공개회담에서 일방적으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왜 했는지 알 수 없는 실망스러운 회담이었다.

회담 이후 민주당은 예고대로 ‘채상병 특검법’을 통과시켰고, 윤 대통령은 예상대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채상병 특검법이 합의되면 합의된 안(案)대로, 안 되면 재심의 요청된 법안에 대한 표결을 통해서 최종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채상병 특검법’이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의 가장 중요한 안건이 될 전망이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21대 국회 마지막 안건은 채상병 특검법이 아니라 국민연금 개혁안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과연 그런 기적(?)이 일어날까.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보험료율 인상(9%→13%)에는 의견 접근을 이뤘으나, 소득대체율 1%포인트 차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국민의힘 44%, 민주당 45%이니 44.5%라도 절충하라는 것이 절박한 요구다.

정치의 본령은 ‘국가의 방향 결정’과 ‘국민 통합’인데 한국 정치는 두 가지 모두 작동 불능 상태다. 대한민국은 용산과 여의도의 ‘이중권력’이 정면충돌하면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비토크라시(vetocracy)’ 늪에 빠져 있다.

향후 정국과 관련한 네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①지난 2년처럼 민주당의 ‘입법 독주’와 윤 대통령의 ‘거부권’이 충돌하는 ‘비토크라시’ ②야당 협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윤 대통령과 ‘법원의 시간’에 쫓기는 이재명 대표의 ‘정치적 타협’ ③대통령의 임기 단축과 대통령 개혁 어젠다를 맞교환하는 ‘2026 체제 개헌’ ④윤 대통령의 임기를 강제로 조기 종식시키는 ‘탄핵’. 대한민국을 위한 최선·차선·차악·최악은 ③②①④ 순이다. 가능성은 ①②④③ 순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이 원하는 시나리오는 ②③①④ 순이고, 민주당이 원하는 시나리오는 ④③①② 순으로 보인다. ‘3년은 너무 길다’며 윤석열 대통령 임기 조기 종식을 공언한 야당은 ‘채상병 특검법’으로 탄핵을 위한 빌드업을 시작했다. 최근 민주당은 스스럼없이 탄핵을 입에 올린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탄핵 열차가 시동을 걸고 있다. 대통령 탄핵이 국민적 유행어가 될 듯하다”며 탄핵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탄핵의 방향으로 계속 기름을 붓고 있는 건 윤석열 대통령 당사자라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탄핵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로 유명한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신작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 법을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지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이 헌법이 보장한 권력을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의회가 탄핵 권한을 남용하는 것이 그 사례다. ‘거부권’과 ‘탄핵’ 모두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지만 남용하는 순간 민주주의를 지키는 기둥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무기라는 경고는 바로 우리 사례 아닌가.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정치는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배를 받고, 국민은 정부·사법·관료 시스템의 행정 통제를 받고, 사법·관료 시스템은 정치의 민주적 통제를 받는다. 먹이사슬(?) 간 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는다. 지금이 그런 상태다. 당론과 공천에서 대중의 지배력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졌다. 반면 민주주의·법치주의·인권 신장으로 인해 사법·관료 시스템의 행정 통제력은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정치의 사법·관료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점점 세지고 있다.

나는 2006년 출간한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의 프롤로그 ‘대중은 통치하고 싶다’에 이렇게 썼다. “대중은 정치인을 지배하기를 원한다. 대중이 정치인을 두려워하는 시대는 가고, 정치인이 대중을 두려워하는 시대가 왔다. (...) 여기 원형 극장이 있다. 노예 출신의 검투사들은 피를 흘리며 싸우다 죽어간다. 황제와 귀족들은 술을 마시며 이를 즐긴다. 그러나 지금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라. 칼을 들고 싸우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놀랍게도 황제다. 대중들은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다. 그렇다. 이제 정치인은 더 이상 통치하는 자가 아니다. ‘죽지 않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원형 극장의 검투사이거나, 피를 흘리며 바닥을 기는 격투기 선수 신세가 되었다.” 이게 오늘날 현실이 됐다.

대중의 통치하고 싶은 욕망과 지배력이 커질수록 정치는 나빠지고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민주당이 우원식 국회의장 선출 이후 강성 당원들이 반발하자 ‘당원 중심 정당’으로 권리 당원 의사 반영을 강화하는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는 국회의장 선출에도 권리 당원 의견을 반영하자는 안까지 나왔다.

민주당은 인지 오류에 빠져 있다. 4년 전 180석을 만들어 줬는데도 개혁을 밀어붙이지 못해 정권을 잃었다는 인식이다. 이번에도 지지층 요구대로 개혁이든 특검이든 탄핵이든 밀어붙이지 못하면 정권을 못 찾아온다고 믿는 모양이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다수가 그런 인식을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지난 대선과 이번 총선에서 승부를 가른 것은 ‘스윙보터’인 중도층이다. 2016년 총선 새누리당 패배, 2020년 총선 미래통합당 패배, 2022년 대선 민주당 패배, 2024년 총선 국민의힘 패배 모두 중도의 지지를 잃었기 때문이다. 압도적 의석으로 ‘검수완박’ 등을 밀어붙인 결과 중도가 이탈한 것이 5년 만에 민주당이 정권을 잃은 이유다. 국민의힘이 총선에서 패배한 것도 ‘보수가 덜 뭉친’ 탓이 아니라 ‘중도가 이탈한’ 탓이다.

선거에서 중도에 관한 검증된 가설은 세 가지다. ①3번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②소선거구제에서 제3 정당이 1당이나 2당이 될 수는 없다 ③하지만 대선이든 총선이든 모든 선거는 중도가 승패를 결정한다. 민주주의의 위기와 선거 패배는 모두 중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성민 정치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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