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첫 줄이 우리를 데리고 갈 것이다

2024. 5. 23.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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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는 것은 스스로를 놓는 작업
펜을 잡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어디로든 달아날 권리를 갖는 것
푸르른 계절, 무엇이든 써보자

햇살을 피해 돗자리를 깔고 여기저기 엎드린 사람들이 보인다. 젊은 아빠들은 부지런히 아이를 쫓아다니고 주변의 꽃들은 색색이 곱다. 모처럼 백일장에 참여하여 또박또박 눌러쓰는 글씨로 몰입해 보려 하지만 쉽게 풀리는 듯 보이진 않는다. 돗자리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집중력을 끌어올려, 뭐라도 써보겠다는 노력이 참 아름답게 보인다. 코로나19로 온라인 공모 방식으로 진행되던 대회들이 다시 야외로 옮겨졌다.

백일장은 조선 시대 때 달밤에 모여 시를 견주던 망월장(望月場)과 대조적으로 낮에 하는 대회여서 생긴 말이라는 설이 있다. 요즘도 백일장은 여러 기관에서 상금과 부상을 걸고 행해진다. 초등부부터 성인들까지 모두 참여할 수 있는 대회가 있는가 하면 특정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도 있다. 가끔 고교 백일장에 심사를 가보면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의 치열한 경쟁 분위기를 느낀다. 수상 이력이 입시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천수호 시인
수상자를 호명하면 큰 상이 아니어도 유난히 크게 환호를 지르는 학생이 있다. “와우!” 비명을 지르며 신명 나게 달려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몸도 덩달아 출렁, 흥이 나고 뭉클해진다. 백일장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속전속결이다. 당일에 결과가 나온다는 것인데, 수상자의 기쁨을 날 것으로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 상을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흥겹다. 그러나 반면에 낙담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 또한 안타까운 현장의 모습이어서, 예전에 체험했던 이런 극단의 감정을 지켜보게 된다.

야외 백일장은 아무래도 바깥 활동이 좋은 5, 6월에 많이 열린다. 특히 5월에만 해도 5월11일에 김소월 백일장, 5월19일에 정지용 백일장이 있었고, 5월25일에는 신동엽 백일장이 열린다. 이렇듯 현장에서 창작하는 백일장도 있지만 투고 기간이 있어서 여유롭게 준비할 수 있는 공모전도 있다. 문학에의 입문은 이런 객관적인 검증의 시간을 거치기 마련이므로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된다. 특히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이 있는데 역사가 36년이나 된 ‘삶의향기 동서문학상’이다. 격년에 한 번씩 시행되는 이 행사는 1회 수상자가 500여명에 달한다. 매회 총상금이 7900만원이며, 대상 및 금상 수상자들에게 “월간문학 게재”를 통한 등단 자격도 부여한다.

이뿐 아니라 동서문학상 주최 측은 공모전 기간에 ‘멘토링 게시판’이라는 창구를 만든다. 응모 장르인 시, 소설, 수필, 아동문학의 네 분야에 총 16명의 작가를 이 게시판에 투입하는데, 참가자들이 익명으로 게시하는 작품에 작가들은 일일이 댓글로 조언을 달아준다. 이렇게 여성들의 문학 활동을 지원하는 이 행사는 동서식품이 제정한 문화 후원사업이다. 한 기업이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지원해 주는 모습은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손바닥 속에 사는 버들치가 자네 가슴으로 헤엄쳐 갈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게/가만히 귀 기울이면 늦은 밤과 새벽에 버들치가 튕기는 물방울 소리, 미세한 신호를 예감하는 듯 꿈틀거리며 혈관을 따라 심장으로 몰려간다네/제거된 내 사랑은 입술과 눈 속을 떠돌아다닌다네/그녀의 뜨거운 피를 모조품이라 말하지 말게/퍼즐을 끼워 맞추는 건 어리석은 습관이네” 이 시는 16회 동서문학상 금상 당선작인 채연우 시인의 ‘복제인간 로이’를 일부 인용한 것이다. 나는 이 시를 달리 읽어본다. 시인의 가슴속에 사는 버들치가 손바닥으로 헤엄쳐가서, 詩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게 되었다고.

등단한 지 스무 해가 넘은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매일 나의 한계를 느꼈지만, 작가의 꿈이 점점 구체적인 현실이 되면서, 쓴다는 것이 스스로를 놓아주는 작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글쓰기를 독려하는 작가인 내털리 골드버그도 “당신은 더 이상 당신 안에 있는 것들과 싸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글을 쓰는 순간에는 어딘가로 잠시 달아날 권리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첫 줄의 시작, 이것이 우리를 어디로든 데리고 갈 것이다.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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