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 “가슴에 한을 품고”…한옥자 할머니의 기억

유용두,강재윤 2024. 5. 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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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제주] [앵커]

4·3의 역사를 증언으로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한옥자 할머니는 1949년 북촌리 학살사건 현장에서 어머니를 잃고 70여 년을 가슴 속에 한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한옥자/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는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면서 배로 비단장사를 했습니다. 일본에서 (비단) 사와서 여기서 팔고 또 나가서 또 해오고. 그때는 잘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4·3 사건) 4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우리 남동생 경림이가 유복자로 태어났어요. 일본에서 태어나 여기 들어와서 한 4년쯤 살았나 봐요. 어머니랑 할머니하고. 어머니하고 할머니하고 고부간의 정이 너무 좋았어요."]

[한옥자/4·3 희생자 유족 : "이 북촌마을을 제일 먼저 몰살시켜야겠다고 그런 생각으로 그렇게 북촌마을을 전부 불태워버리고. 어머니가 총 맞아서 돌아가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막동생은) 4살 때니까 어머니 가슴에 매달려서 젖을 빨았어요. 그 애가. (북촌) 학교마당에서 당했는데 6남매가 뿔뿔이 다 각각 헤어져서 앉아 있어요. 이리 몰고 저리 몰고 하다 보니까 8살이니까 제가 뭘 알겠어요. 제가 8살이었거든요. 1학년 다니다가 4·3사건을 당해서 학교도 못 다니고 어머니는 그때 연세가 41세에 6남매를 두고 돌아가셨어요. 동쪽으로 막 군인 대장이 오면서 중지, 중지하면서 오니까 그 말을 들어서 총살을 하다가 중지하는 바람에 우리도 살아났어요."]

[한옥자/4·3 희생자 유족 : "그 밤에 함덕으로 피난을 가서, 함덕이 우리 외가였습니다. 우리 외삼촌도 4·3에 돌아가시고. 그래도 갈 데가 없으니까 함덕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이튿날부터는 먹을 게 없잖아요. 70대인 할머니가 우리 6남매를 길러줬는데 할머니가 함덕에서 밥을 얻으러 다녔어요. 밥을 이렇게 큰 양푼에 비워두면 가운데 숟가락을 하나 딱 꽂아요. "할머니, 왜 이 숟가락은 왜 가운데 꽂았어요?" 이렇게 우리가 물어보면, "그것은 너희 눈 앞에 안 보이지만 너희 어머니가 이 자리에 와 계시다, 너희 어머니 수저다. 너희 보고 싶어서 이 자리에 매일 와 있다"고. 배가 고파서 밥을 먹으려고 하다 목이 메서 밥을 못 먹어요. 우리 6남매가."]

[한옥자/4·3 희생자 유족 : "김녕에 친척이 있었습니다. 바로 밑에 여동생하고 나는 김녕으로 가버리니까. 언니가 제일 고생을 많이 했어요, 오빠들은 다 고아원에 가고. 할머니하고 우리 언니 살아온 생각 하면 (할머니는) 함덕에서 그 엄동설한에 새벽에 걸어서 밭에 와 잡초 매고 언니는 밥을 가져오려면 8시나 9시 돼서 가져오다가 (어머니 돌아가신) 학교 마당 다 와 가면 그 눈물을 흘리니, 앞이 캄캄 눈이 캄캄해서 엎어져서 그 밥이 다 쏟아지고 너무 말이 안 나옵니다."]

[한옥자/4·3 희생자 유족 : "결혼할 때하고 첫 애를 낳을 때 그때, 그때가 어머니 생각이 너무 나 가지고. 4·3사건이 왜 일어나서 우리 6남매를 가슴 아프게 만들었나. 우리 6남매 뿐 아니고 우리 북촌 사람들 다 고생했습니다. 저 너븐숭이 기념관 가면 들어가는데 우리 어머니 형상, 아기 젖먹이를 그려 놨다니까 나 거기 가면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안 봤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유용두 기자 (yyd9212@kbs.co.kr)

강재윤 기자 (jaeyu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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