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 칼럼] 국가 연구개발 `예타`, 발전적으로 개선해야

2024. 5. 23.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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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윤석열 대통령이 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예타)의 폐지를 지시했다.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대통령의 돌발적인 지시는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연구개발 예산의 원점 재검토를 지시했던 작년 6월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예타 폐지의 명분이 확인된 것도 아니고, 폐지의 부작용에 대한 고민도 찾아볼 수 없다. 국가의 미래가 달린 과학기술 정책은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예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경제성 중심의 경직된 평가로 시간만 낭비하는 예타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의 거래·투자에 활용하는 어설픈 기술가치 평가로는 아무도 만족할 수 없다. 과학기술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선무당급 전문가와 관료에 의한 형식적·관행적 평가는 의미가 없다. 연구개발 사업의 성과 평가는 과학기술 전문가에 의한 복합적이고 유연한 평가가 핵심이 되어야만 한다.

지난 18년 동안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전담해 왔던 대규모 연구개발 사업의 예타가 아무 쓸모 없는 무용지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반 SOC 사업에 적용하던 '예타'를 연구개발 사업으로 확대 적용하기 시작했던 2008년은 연구개발 예산이 연평균 10% 이상 늘어나면서 처음으로 그 규모가 10조 원을 넘어서고 있던 때였다. 예타는 국가 연구개발 사업의 '부실'과 '중복'을 걸러내는 훌륭한 제도적 장치였다.

그런데 부처의 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역량은 여전히 부족하고, 부처 사이의 칸막이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관료들의 섣부른 영향력은 오히려 더 커졌다. 정부의 모든 부처가 경쟁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연구개발 사업의 부실과 중복에 대한 우려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무 대책도 없는 예타 폐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타는 졸속으로 폐지해 버리는 대신 발전적으로 개선해야 할 제도다. 예타의 적용 규모를 상향 조정하고, '신속조사' 방식을 도입해서 예타에 의한 시간 낭비를 줄여야 한다. 꼬리에 지나지 않는 예타가 몸통인 연구개발 사업을 옭아매고 있는 현실도 개선해야 한다. 예타 개선을 위한 혁신본부의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연구개발 예산의 복구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정부 재정이 최악인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통령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연구개발 예산의 복구를 위해서는 다른 부처의 예산을 큰 폭으로 삭감할 수밖에 없다. 작년에는 '떼도둑'으로 내몰렸던 과학기술계가 이번에는 예산을 빼앗기는 부처로부터 돌팔매를 맞게 될 수도 있다.

올해 삭감된 연구 현장의 예산이 내년의 예산 복구로 되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다. 떡을 쥐고 있는 정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정부가 총선 직전에 공개한 양자기술·첨단바이오·AI-반도체 등 소위 '3대 이니셔티브'와 올해부터 시작한 '글로벌 R&D'에도 엄청난 예산이 필요하다. 특히 양자기술의 경우에는 정부가 무려 1조 원에 가까운 투자를 들먹이고 있다.

결국 예타를 폐지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는 3대 이니셔티브를 밀어붙이기 위한 꼼수인 셈이다. 예타 적용 면제를 위해 연구개발 사업을 나누고, 쪼개는 시늉조차 하고 싶어하지 않다는 것이 정부의 확실한 입장이다.

예타 폐지의 부작용을 심각하게 걱정해야 한다. 막대한 예산이 배정될 3대 이니셔티브를 외면하는 부처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더 많은 예산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릴 수 없는 것이 부처의 안타까운 속성이다. 연구개발 사업의 부실과 중복에 대한 자발적인 관심은 기대할 수 없다.

예비타당성조사를 규정한 국가재정법 제38조에서 국가연구개발 사업을 삭제하는 일도 쉬울 수가 없다. 새로 구성되는 22대 국회의 거대 야당이 정부의 예타 폐지 시도에 동참해 줄 이유가 없다. 결국 대통령의 재정전략회의에서의 즉흥적인 지시가 흔들리는 과학기술 정책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과학기술은 화려한 구호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책 환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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