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할 순 있어도 흉내낼 순 없다…에르메스 장인정신

김보라/양지윤 2024. 5. 23.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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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왕의 특급비밀 엿보다
'에르메스 인 더 메이킹'전
10번째 여행지, 서울
11명의 가죽·보석·실크 장인
佛·스위스 공방에서 벗어나
韓관객 앞에서 실시간 작업
▲ 에르메스 가죽 장갑 장인이 가죽을 재단하고 있다.


‘HERMES IN THE MAKING.’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가 장인 11명과 함께 열고 있는 전시의 이름이다. 해석하자면 ‘에르메스는 작업 중’ 정도가 되겠다. 이 전시명엔 여러 뜻이 담긴다. 우선 1837년 마구 공방에서 시작해 200년 가까이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 이어지고 있는 에르메스가 어떻게 세대를 거슬러 그 유산을 지켜오고 있는지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다. 여기까지는 다른 명품 브랜드들도 세계 곳곳에서 열고 있는 헤리티지 전시들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6대에 걸쳐 명품을 명품답게 만드는 지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에르메스 아닌가.

이들이 ‘에르메스 인 더 메이킹’ 전시를 기획하며 내세운 것은 ‘사람’이다. 오직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져온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다. 에르메스가 고집스럽게 지켜온 전통 공예 기술을 배우고, 탐구하고, 연마하고, 창조하는 그들이 이 전시의 주인공이다. 11명의 ‘살아 있는 장인들’이 프랑스 전역과 스위스에서 각자 공방의 기구와 기물을 가져와 자신의 작업을 수행하는 연극 같은 라이브 퍼포먼스가 전시장 안에서 펼쳐진다. 2021년 10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시작돼 토리노, 디트로이트, 싱가포르, 교토, 릴, 시카고, 방콕, 멕시코시티 등 9개 도시를 거친 ‘에르메스 인 더 메이킹’ 은 열 번째 도시로 서울을 찾았다.

▲ 에르메스 장인이 비바스 안장을 만들고 있다.


지난 18일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잔디광장에서 개막해 27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아무나 가질 수 없고, 그래서 욕망하는’ 에르메스의 핵심 경쟁력이 곧 장인이요, 세대와 국경을 뛰어넘은 이들이 곧 에르메스의 미래라는 것을 누구보다 진정성 있게 알리고 있다. 과거의 기술이 현재에도 유효하며 계속 진화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에르메스 소속 장인 수는 7300여 명. 에르메스는 프랑스 11개 지역에 50여 개의 공방을 보유하고 있고, 2021년 9월엔 프랑스 교육부 인가를 받아 ‘에르메스 기술 트레이닝 센터’도 문을 열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11명의 에르메스 장인은 에르메스 본사의 공개 모집에 손 들고 지원한 이들이다. 모처럼 공방을 벗어나 서울로 여행온 이들은 몰려든 관람객들에게 반짝이는 눈으로 매일 여러 차례 시연을 반복했다. 입장료는 무료지만 하루 200명의 예약자가 우선 입장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문을 열자마자 폐막일까지 관람권이 모두 매진됐다. 미처 전시를 보지 못했거나, 봤더라도 전시장의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독자들을 위해 디테일들을 기록했다.

‘에르메스 인 더 메이킹’ 전시에 승마용 안장을 만드는 에르메스 장인들의 공방이 들어서 있다. @Kyungsub Shin

(1) 에르메스의 뿌리, 가죽 공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구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시작된 에르메스. 가죽 공예는 에르메스의 핵심 기술과도 같다. 에르메스 가방은 100% 프랑스에서 수작업으로 제작된다. 2010년부터 에르메스는 지역 곳곳에 연평균 1개의 가죽 공방을 새로 설립해 매년 250~280명의 장인을 모집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승마용 안장을 만드는 섹션. 지난해 4월 에르메스는 21번째 가죽 공방을 루비에르 지역에 새로 열었다. 서울을 찾은 한 장인은 단단한 가죽의 가장자리를 아주 작은 칼로 조각하고 사포로 갈아 어떤 소재보다 부드럽게 세공하는가 하면, 목재 위에 가죽을 덧씌워 민첩하게 당기거나 늘리며 ‘가구보다 편안한 안장 만들기’에 열중했다.

가죽은 세월을 머금으며 그 튼튼함이 빛나지만, 작업 과정만큼은 섬세하다. 예컨대 ‘켈리 백’은 40여 개의 가죽 조각을 조립하는데, 본체를 조립하는 첫 과정에서부터 정교하고도 강한 힘으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가죽 장인이 팔 사이에 가죽 조각을 고정한 채 민첩한 손동작으로 밀랍 코팅된 실을 ‘새들 스티치’로 꿰어 만든다. (새들 스티치는 전통적인 말 안장 박음질 기술이다.) 장인들은 말한다. “이건 오로지 직접 해봐야만 아는 에르메스 최장수 노하우”라고.

◀ 에르메스 장인이 오브제를 수선하고 있다.


전시장 한편엔 가죽 장갑 장인도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원래의 내 피부처럼 부드러운 가죽 장갑은 22단계 제작 과정을 거쳐야 완성된다. 가죽 안쪽을 스펀지로 다듬어 부드럽게 하고, 손으로 가죽을 힘껏 늘이거나 가장자리 부분을 섬세하게 손끝으로 밀어내고 당긴다. 손과 엄지손가락, 손가락 사이 부분과 솔기에 여러 크기의 가죽 조각을 덧대가며 완성하는 것. 수작업으로 재봉한 뒤 ‘핫 핸드’라고 불리는 장갑용 다리미를 이용해 더 유연한 질감이 되도록 마무리한다. 가죽장갑 장인은 “평소 10명의 장인이 하나의 장갑을 함께 만든다”고 했다. 프랑스 중부 생쥐니앙과 오트비엔 일대의 에르메스 장갑 공방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살아있는 문화유산 기업’을 뜻하는 ‘EPV’ 공식 인증도 받았다. 축산업이 발달한 이 지역에선 중세 시대부터 최고의 가죽 장갑을 제작해왔다고 한다.

佛 리옹의 '천년 실크공예'…캔버스에 마법이 뿌려진다
7만5000가지 색조 조합…자연에서 재료를 찾다

‘에르메스 인 더 메이킹’ 전시에서 에르메스 장인이 실크 프린팅 공정을 시연하고 있다. @Kyungsub Shin

(2) 눈부신 실크 스카프의 비밀

에르메스 인 더 메이킹에서 관람객들의 발길을 가장 오래 머무르게 한 건 실크 프린팅 섹션이다. 화려한 색상이 눈길을 먼저 사로잡는데, 그 과정은 더 놀라워서다.

에르메스 실크 스카프의 주요 공정은 ‘아 라 리요네즈’라 불리는데, 그 뜻은 ‘리옹의 방식에 의한 것’. 실크에 정교한 무늬와 색을 입히는 진귀한 작업은 프랑스 전통 실크 공예인 ‘평판 스크린 기술’에서 유래했다. 150에 달하는 프린팅 테이블 위에 밑그림을 새겨진 프레임을 덮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색을 부어 페인트를 칠하듯 펴내면 프레임 아래 있던 천에 정확히 원하는 위치에, 한 번에 한 가지 색상만 새겨지는 광경이 펼쳐진다. 얇은 감광 망사 천으로 덮인 거대한 프레임 위를 지나는 장인의 손길은 그 속도와 힘이 일정하게 배분된다.

평균적으로 에르메스 실크 스카프 하나를 만드는 데는 25가지에서 30가지의 색상이 필요하다. 더 복잡한 디자인엔 48가지의 색상이 쓰인다. 디자인에 따라 쓰이는 색상 수만큼의 프레임과 그만큼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는 얘기다. 다채로운 디자인은 투명 필름에 각인 장인이 손으로 새겨 넣는데, 이후 이 디자인에 필요한 마감 효과와 상세한 색상 정보는 디지털 파일로 생성된다. 에르메스가 스카프를 만드는 데 쓰는 색조는 7만5000가지에 이른다. 실크 스크린 프린팅 장인이 되려면 최소 3년이 걸리고, 이 중 2년은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야만 한다고.

‘에르메스 인 더 메이킹’ 전시장 전경.


(3) 세필화가가 도자기를 만나면

에르메스가 ‘장인의 기술’과 함께 명품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결코 타협하지 않은 것 중 하나는 최고의 재료다. 화학 성분을 섞지 않은, 천연의 광물과 가죽을 고집하면서 한때 다른 명품 하우스들이 대량 생산으로 확장에 뛰어들던 1970년대 초, 상대적인 위기를 겪기도 했다. ‘축소 지향의 브랜드’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면서도 에르메스는 전 세계의 천연 원자재를 찾아다녔다. 곧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이 다시 천연 동식물 원자재로 만든 제품을 찾기 시작하며 에르메스의 가치는 수직 상승했다.

‘포슬린(도자기) 페인팅’ 전시 섹션.

자연에서 얻은 우수한 재료를 찾아 아름답게 가공해온 이들의 문화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중 하나를 볼 수 있는 곳이 ‘포슬린(도자기) 페인팅’ 전시 섹션이다. 이곳에서 만난 여성 장인은 새하얀 접시 위에 스케치로 그린 표범, 그 표범의 잔털 한올 한올과 눈동자까지 섬세한 붓질로 담아내고 있었다. 끝이 잘 보이지도 않는 얇디얇은 붓을 쥔 그는 일부분만 칠한 뒤 여러 번 굽고 식히는 작업을 반복했다. 최대 800도까지 온도에 따라 색상이 반응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비슷한 온도를 필요로 하는 색깔끼리 칠한 뒤 굽고 또 굽는다.

이 장인이 작업하는 곳은 프랑스 리모주 지역. 18세기 유럽인들에게 백색의 중국 도자기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로 여겨졌다. 그 안에 고령토 성분이 들어 있어 투명하고 맑은 백색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이후 리모주 인근 생 이리에 라 페르슈 지역에서 고령토 광산이 발견된 것. 이 지역에선 광산이 발견된 이후부터 흙을 빚어 불에서 구워낸 프랑스산 도자기를 만들어냈다.

에르메스 시계 장인이 플레이트 위에 부품을 끼워 넣고 있다.


(4) 실험실 과학자 같은 보석 세공 장인들

반짝이는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와 스톤을 정밀하게 금속 위에 끼워 넣는 ‘젬스톤 세팅’ 섹션은 마치 거대한 실험실을 연상시켰다. 얇은 바늘을 연상케 하는 ‘프롱(prong)’이란 도구로 미세한 크기의 보석을 끼워 넣는 장인은 대형 확대경 옆에서 맨손으로 작업했다. 납작 날 조각칼로 금속을 밀어 고정하는 작업은 누구보다 꼼꼼하고 정밀하게 해야 하는 일이라고.

시계 장인 역시 원판형 디스크에 바늘을 부착하는 세밀한 조립 과정을 보여줬다. ‘플레이트’라 불리는 판 위에 고정 부품을 하나하나 끼워 넣고, 기어를 조정해 기계식 무브먼트를 완성했다.

‘젬스톤 세팅(보석 세공)’ 전시 섹션.


이번 전시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수선 장인들의 섹션. 매년 20만 개 이상의 제품이 수선이나 복원을 위해 에르메스를 찾아온다. 세계 12개 도시의 공방에 있는 장인들은 여기에 마치 새 생명을 불어넣듯 작업한다. 색상을 되살리거나 스티치를 다시 하는 과정은 섬세함과 함께 결단력과 창의성도 요구되는 일이라는 게 이들의 공통된 말이다.

수선 장인들은 복원과 수선의 시간을 거치며 “버려질 수 있는 작은 부분도 신중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됐다”고 했다. 사용하고 남은 재료, 제작 과정에서 쓰지 않은 재료는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했다. 가죽 조각이나 실크 조각으로 제작한 창의적인 소품 ‘쁘띠 아쉬(petit h)’, 디자인과 컬러가 각각 다른 실크 팔찌 ‘뚜르비옹’ 라인도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에르메스의 원석이 보석이 돼 가는 과정을 가까이서 보고 만져볼 수 있었다는 것, 요즘의 세상과는 다른 속도로 살고 있는 장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 있는 전시였다. 장인들의 말속에도 그 답이 있다. “우리는 그 어떤 지름길도 택하지 않는다.”

김보라/양지윤 기자 /사진=@Kyungsub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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