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에 아버지 무죄 받아낸 딸...법원 "조금이나마 위로와 치유되길"

조해언 기자 2024. 5. 2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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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재일동포 간첩' 몰린 고 최창일씨 재심 선고
재판부 "중대한 인권침해 인정...사법부 일원으로 깊은 사과"
"그는 50여년 전 조국으로 건너와 꿈을 펼치려던 재일 한국인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간첩으로 기소되어 형이 확정되는 과정에서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었습니다.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가 되어야 할 사법부는 그 임무를 소홀히하였습니다."

통역이 이어지는 동안 잠시 숨을 고른 재판장은 다음 말을 천천히 이어갔습니다. 아버지 대신 피고인 석에 앉은 딸 최지자(나카가와 도모코)씨는 통역사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늘 법원이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과거의 판결을 바로잡는다고 하여 고인과 가족들이 받았던 고통이 쉽게 회복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판결이 망 최창일 선생과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치유의 의미를 갖기를 바랍니다.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대한민국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 주문. 피고인은 무죄 "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법정 가득 울려퍼진 박수소리는 10여 초간 이어졌습니다. 법대에 앉은 재판장, 피고인 석에 자리한 변호인과 유족, 그리고 방청석 곳곳의 활동가와 시민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바쁘게 오갔습니다. 50년 만에 바로잡힌 진실에 함께 기뻐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이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조국으로 건너와 꿈을 펼치려던 재일 한국인 청년"


서울고법 형사13부(부장판사 백강진 김선희 이인수)는 오늘(23일) 오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고 최창일 씨의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최창일 씨 가족 사진. 왼쪽부터 고 최창일 씨, 딸 지자씨, 최씨 어머니. 〈사진=최지자씨 제공〉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난 최 씨는 도쿄대학원에서 자원개발공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뒤 한국에 넘어와 서울대학교에서 강사로 일을 하며 꿈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1973년 6월, 3개월 만에 육군 보안사령부에 체포됐습니다. 최씨는 '간첩 활동을 하려 국내에 입국한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1974년 법원은 징역 15년을 선고했습니다. "북한에서 지령을 받았다, 조총련계와 내통했다"는 등의 자백이 주요 근거가 됐습니다. 민간인을 수사할 권한이 없는 보안사가, 최씨를 불법 구금상태한 상태에서 받아낸 자백이었습니다. 최씨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나기 전까지 약 6년 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 1998년 뇌종양으로 투병하다 사망했습니다.

뒤늦게 아버지의 일을 알게 된 딸 최씨는 2020년 1월 재심 청구를 했습니다. 지난해 11월 재심 개시 결정을 받기까지 3년 10개월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로부터 또 반 년여가 지난 오늘에서야 무죄 선고를 받게 됐습니다.

선고 직전 검찰이 제출한 420쪽 의견서.."징역 7년 선고해달라"


재심 결과는 지난 2월 15일 나올 예정이었습니다. 일주일 전 검찰이 추가로 의견서를 제출하며 선고가 석 달 넘게 밀렸습니다. 검찰은 "최씨가 불법 구금상태에서 진술한 내용에는 증거 능력이 없더라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으며 법정에서 자백한 내용은 유효하다고 봐야 한다"며 최씨는 유죄라고 주장했습니다. 최씨가 과거 법정에서 일부 혐의를 부인했던 점을 들어, 최씨가 자유롭게 진술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러면서 일부 불법 수사가 있었던 점을 감안해 징역 7년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먼저 "법정 진술 역시 불법 구금상태에서의 진술이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며 법정에서의 자백은 유죄의 증거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최씨가 북한의 지령을 받기 위해 탈출하고,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는 등의 혐의 모두 최씨의 자백 외에는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오늘 판결로 고통이 쉽게 회복되진 않겠지만…"


2024년 5월 23일 오후 고 최창일씨의 딸 최지자(나카가와 도모코)씨가 재심 선고 뒤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이고 있다. 〈사진=조해언 기자〉
오늘 아침 일본에서 온 딸 최 씨는 재판이 끝난 뒤 꽃다발을 받아 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최 씨는 "저는 회복하는 과정에 있다"면서도 , 아직 한국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는 어머니와 오빠의 아픔이 언제 치유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국가 차원에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주고,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끝까지 최씨의 유죄를 주장했던 검찰을 향해서는 "상고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습니다.

2024년 5월 23일 망 최창일씨의 재심 선고가 끝난 뒤 최지자씨와 최정규 변호사 등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사진=조해언 기자〉
최 씨를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도 "문무일 검찰총장 시절에 만든 재심 관련 사건 매뉴얼에는 무분별한 항소, 상고를 자제해야 한다고 나와있다"며, "이미 오랜 시간 재판을 끈 만큼 상고를 하지 않는 것이 상식적이라고 본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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