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의 창]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료 시스템

2024. 5. 2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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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영국으로 유학 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의료 시스템이었다.

보수당이 영국 의료의 질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고가 의료를 인정한 이유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료 시스템을 환자가 원하는 전문적인 진료를 빨리 낮은 비용으로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경쟁력은 내가 경험한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다.

영국처럼 부가가치세가 무려 17.5%에 달할 만큼 많은 세금을 내거나 미국식으로 고가의 의료비를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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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전국민 의료보장 시스템
해외대비 경쟁력 탁월한데
필수의료 접근성은 떨어져
지속가능성 확보하기 위해
재정과 의대증원 조화 필요

1990년대 초반 영국으로 유학 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의료 시스템이었다. 몸이 아프면 동네 가정의에게 쉽게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비용은 공짜였다. 전국 어디서든 균일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영국 의료의 우수성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곧 큰 실망으로 바뀌었다. 기말고사 준비를 하다가 급성 중이염을 앓았고 전문의를 만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가정의가 준 항생제로 버티면서 전문의는 8주 후가 돼서야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영국 정당들이 왜 선거 때마다 의료 시스템을 놓고 격돌하는지 이해했다. 노동당은 공공의료 시스템에 더 많은 돈을 투입하면 전문의를 만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보수당의 오랜 신념은 전문의들이 공공의료의 틀을 벗어나 쉽게 민간병원을 열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문의 접근은 쉬워지지만 부자일수록 유리해지는 것이므로 영국인들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었다. 노동당은 의사들의 소득을 압박하여 의사와 간호사 간 임금 격차를 거의 없앴다. 그 결과 유능한 의사의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주해버렸다. 보수당이 영국 의료의 질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고가 의료를 인정한 이유다.

20년 후 경험한 미국 의료는 반대였다. 전문의는 용이하게 만날 수 있었지만 비용이 많이 들었다. 꽤 좋은 의료보험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치아 두 군데 신경치료를 위해 자기 부담 20% 비용으로 약 250만원을 냈다. 의료비가 비싸다 보니 의료보험 없이 의료보장의 사각지대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교민들이 은퇴 이후 고국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홍콩의 의료는 절충형이다. 미국 유명 대학에서 학위를 딴 유능한 의사에게 언제든 진찰을 받을 수 있지만 엄청난 고가였다. 물정을 모르고 몸살감기로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치료비만 약 25만원을 냈다. 이후 이력이 붙으면서 변두리로 가서 양질의 진료를 싼값으로 받는 요령을 터득했다. 홍콩 의료의 '넘사벽'은 공공병원이 책임지는 긴급 의료다. 아들이 밤중에 아파서 구급차를 부르니 의사를 비롯해서 6명이나 왔다. 다행히 큰 병이 아니어서 금방 퇴원했지만 놀랍게도 비용은 100홍콩달러, 1만3000원 정도였다. 도시국가이고 재정이 건실하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부러운 것은 사실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료 시스템을 환자가 원하는 전문적인 진료를 빨리 낮은 비용으로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경쟁력은 내가 경험한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다. 전 국민 의료보장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우리 현실에 적합한 효율적인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불만의 목소리도 여전하다. 영국에 비하면 지역의 의사 접근권이 부족하다. 소위 필수의료 기피 현상이 심화하면서 환자들의 어려움은 가증되고 의료의 질적 저하를 걱정하고 있다.

필수의료를 강화하고, 지역의 의료 접근권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다. 문제는 이 과제를 이루려면 엄청난 돈이 든다는 사실이다. 필수의료의 수익성을 높이려면 의료보험료를 올려야 하고,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는 지역에서 의료시설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투입되어야 한다. 영국처럼 부가가치세가 무려 17.5%에 달할 만큼 많은 세금을 내거나 미국식으로 고가의 의료비를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 재정의 쓰임새를 조정해서 필수의료 중심으로 지원을 늘리는 일도 불가피하다. 의대생을 증원하더라도 시너지를 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추가되어야 하는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광해 칼럼니스트·전 국제통화기금 대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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