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소 감성’ 최대치<그때 우리가 조아한>이 재밌는 이유…작가 YOON 인터뷰

김효실 기자 2024. 5. 2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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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YOON② 100% ‘J(계획적 성향)’ 작가의 클리셰 비틀기 놀이터
2024년 4월23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한 윤(YOON) 작가. 류우종 기자

◆<유부녀 킬러> <그때 우리가 조아한> 윤(YOON) 작가의 이야기가 앞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아는 맛’에 배신당하는 즐거움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533.html

비범한 인물들이 지닌 평범의 조각 

<유부녀 킬러>는 킬러 일을 ‘보통의 노동’인 것처럼 덤덤하게 묘사해서 독특했어요. ‘슬기로운 킬러들의 직장생활’ 같은 톤앤매너가 느껴졌어요.

 “킬러가 등장하는 작품들 속 캐릭터가 대개 무겁고 어둡게 묘사되는 데 염증을 느꼈던 것 같아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을 때 매력이 배가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보나를 포함한 두루미전자 동료들은 비록 법의 느슨한 구멍 탓이라고는 해도 자신들이 하는 일이 범죄라는 인식, 혹은 ‘좋은 사람’이 할 일은 아니라는 자각을 하는 것처럼 보여요. 청부살인과 무관한 영업1팀에서 잠시 파견 온 김철수씨 에피소드가 대표적이죠. <유부녀 킬러>는 평범한 다크 히어로물로 분류하기 어려워 보여요.

“겉으로 아무리 평범해 보여도 킬러 일을 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관념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평범을 위장했을 뿐이지 인생에 전혀 평범하지 않은 부분이 있거든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 모든 순간 연기를 하거나 거짓을 말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아무리 킬러라도 밥은 먹고 살 것이고, 야근하기 싫고, 월급이 나오면 기쁘지 않을까요? 모든 캐릭터가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평범의 조각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윤 작가가 <유부녀 킬러>에서 애정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 시즌1 7화에서 과거 회상 신 속 현남이 보나에게 구원받았음을 표현한, 일명 ‘메리 크리스마스’ 장면이다. 윤 작가는 “하얀 눈 위에 새겨지는 현남의 발자국을 마치 핏자국처럼 표현한 그림작가 검둥의 연출이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YOON·검둥 제공

범죄 피해 사례가 많이 등장하는데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대신 가해자를 초라하게 만드는 연출이 인상적이라는 독자 댓글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피해자의 피해 장면을 넣지 않아도 이야기가 표현된다면 지양하는 편이에요. 모든 피해 장면을 빼는 건 아니지만 최소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작품을 보고 계실, 과거에 피해자였을지도 모를 분들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요. 나쁜 것은 오로지 가해자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고 싶기도 하고요. ‘불행 포르노’(Misery Porn, 캐릭터에게 일어나는 비극 요소를 과하게 다루는 서사)는 사용하고 싶지 않아요.”

진지함과 유머 사이 완급조절이 뛰어나요. 비결이 뭔가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요. 멋진 대답을 하고 싶은데 딱히 비결이 없이 그냥 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힘이 들어간 것 같을 때는 개그를 넣어서 한 템포 쉬어갔고요. 적절히 배치됐다고 느끼셨다면 다행입니다. 눈치게임에 승리한 기분이네요. 사실 개그 컷은 검둥 작가님이 워낙 표현을 잘해주신 점도 큽니다. 제가 쓴 시나리오보다 검둥 작가님의 콘티가 훨씬 재밌거든요. 저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여성서사, 전형성 피하고 재미를 좇다보면

다른 인터뷰에서 “첫 번째 요소로 재미를 뒀다. 의미는 재미를 따라가다보면 후에 오는 것이 돼야지, 처음부터 의미를 생각하고 시작하면 재미가 없어지더라”고 말했죠. 재미와 의미,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재미의 가장 큰 요소는 가독성과 의외성이라고 생각해요. ‘술술 읽히는데 뒤를 예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물론 예상이 가는데도 재밌는 이야기도 있고요. 의미는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어떤 교훈과 메시지를 넣을 주제는 못 되지만 질문은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질문을 작품을 보는 내내 끌고 가며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보고 싶어요. <유부녀 킬러>의 경우 ‘두루미전자 같은 곳이 필요할까?’ 같은 질문이죠.”

“잘생긴 신입이 올 것”이라고 미끼를 던진 뒤 여성 신입사원 ‘현남’을 등장시키거나, 여성 캐릭터를 남성 캐릭터의 각성을 위한 도구·구원자로 쓰는 대신 여성 주인공 보나를 구원하는 게 남편 태성이라는 점 등 젠더 스테레오타입에 균열을 내는 표현이 자주 등장해요. <유부녀 킬러>를 ‘여성 서사’로 분류하는 평가도 있고요.

“이것도 무언가 노리고 썼다기보다는 재미를 쫓다보니 여성 서사를 쓰게 된 것 같아요. 최근엔 여성 서사가 꽤 생겼지만 제가 콘텐츠를 한창 향유할 어린 시절에는 남성 서사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여성 캐릭터는 누군가의 아내, 연인 등으로 한정적인 역할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그때 본 전형성을 피하고 싶은 측면이 있어요. 기존 남성 서사 주인공 성별을 여성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새로움을 주기도 하니까요.

또 작품을 쓸 때 젠더 관련한 걸 일일이 신경 쓰기보다는 스스로 젠더 감수성이 높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래야 그런 부분이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서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꾸준히 노력하려고 해요. 지금은 주인공이 여성인 이야기를 쓰고 있고, 차기작도 여자들 얘기일 것 같기는 한데(웃음) 제 화원에는 남성이 주인공인 이야기, 성소수자가 주인공인 이야기 등 다양한 씨앗을 심은 화분이 준비돼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를 죽인 보나에게 복수하나 싶었는데 ‘보나 덕후’로 밝혀진 현남, 평범한 여성인 줄 알았는데 유도 능력자로 드러나 차갑디차가운 기영도 대리의 마음을 ‘심쿵’하게 한 세아 등 <유부녀 킬러>는 작품에서 클리셰를 비틀어 일으키는 재미가 상당하다. <그때 우리가 조아한>은 2000년대 대유행한 ‘인소’(인터넷소설)를 쓴 주인공 최아란이 자신이 창조한 인소의 세계에 빨려 들어가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웹툰 말풍선에 이모티콘을 병기해 ‘인소 감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그놈은 멋있었다> <늑대의 유혹> 등으로 독자에게 친숙한 ‘인소’ 클리셰를 대놓고 갖고 논다.

뻔할수록 확실한 매력

<하르모니아> 대표 이미지. 네이버웹툰 제공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모든 클리셰는 한때 신선했고 독창적이었다. 관객에게 사랑받았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클리셰의 생각 없는 차용이 따분한 이유는 그것이 기성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성이 없기 때문”이라면서도, “진부함에는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며 클리셰의 존재 의미를 폄하하지 않는다. 많은 관객에게 클리셰는 “일종의 제식”이자 “놀이터”이기 때문이다(<여자 주인공만 모른다>, 제우미디어 펴냄).

윤 작가는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클리셰 놀이터를 제공하는 데 특출나다. 윤 작가에게 ‘클리셰를 파괴하려고 탐구하는지’ 물었다. “클리셰는 이미 제 안에 있어요. 왜냐하면 저도 독자니까요. 클리셰는 어떤 법칙 같은 것이니까, 독자로 쌓아온 경험치로 클리셰를 파악할 수 있죠. 그 법칙을 이용해서 독자의 뒤통수를 칠 수 있고요.(웃음) ‘이 정도면 독자님들이 착각할까?’ 이렇게 고민하죠. 어떤 경우엔 독자 분들이 가진 데이터가 너무 많으니까 조금만 떡밥을 던져도 알아서 엉뚱한 곳으로 가주세요.(웃음) 너무 귀엽습니다.”

에필로그

“(<유부녀 킬러>가 인기를 끌기 전에) 인터넷 검색창에 ‘유부녀 킬러’라고 검색하면 ‘19금’ 콘텐츠만 나왔는데, 이젠 아니다. ‘검색어 정화’라는 긍정 효과가 있다.” 윤 작가를 만나기 전 그가 다른 인터뷰에서 한 말을 보다가 웃음이 터졌다. 그는 드라마 <부부의 세계>(JTBC)가 큰 화제일 때 연재를 시작한 덕을 봤다고도 덧붙였다. 작품처럼 유쾌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막상 윤 작가는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뒤 스테이플러 심을 가지런히 찍은 A4용지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전날 저녁 질문지를 보냈는데 답변을 써서 출력해 온 것이다. 한글 프로그램 바탕체, 장평 90, 자간 -8. 순간 다른 인터뷰에서 읽은 또 다른 정보가 생각났다. “제이(J, MBTI 특성 가운데 계획·체계를 선호하는 유형)라고요.” 데뷔작 <야수의 노래>는 <신과 함께>(주호민)를 보고 한국 신화에 관심이 생겨 각종 화소를 수집해 사전처럼 정리하다가(역시 제이) 이야기로 발전했다.

인터뷰 중에 작가 친구들과 게임을 하다 진 사람에게 ‘데뷔작 1화 읽기’ 같은 가혹한 벌칙을 내린다는 사실을 듣고는 다시 웃음이 터졌다. 스토리 작가의 존재는 웹툰의 정체성이 그림뿐만 아니라 ‘이야기’라는 점을 알려준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윤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작품목록

<야수의 노래>(그림 JINU) 2014년 8월16일~2017년 8월1일 레진코믹스에 연재.

고등학생 윤호가 살아 있는 채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 ‘시왕국’에 간 뒤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 다양한 한국 설화를 활용한 판타지 액션 소년 성장물.

<하르모니아>(그림 JINU) 2018년 4월5일~2020년 7월23일 네이버웹툰에 연재.

21세기 인류는 노화방지약 ‘하르모니아’ 개발로 영생을 얻었다. 하지만 약 개발 18년 뒤 약의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견돼 디스토피아가 시작된다.

<유부녀 킬러>(그림 검둥) 2020년 5월16일부터 카카오웹툰에 연재 중.

5년차 기혼 여성이자 희대의 암살자 ‘킹피셔’ 유보나의 이중생활.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만화 부문 한국콘텐츠진흥원장상(2021년), SC웹툰어워즈 최고 웹툰상(2023년) 등 수상.

<그때 우리가 조아한>(그림 움비) 2022년 1월29일부터 카카오웹툰에 연재 중.

최아란은 학창시절 ‘인소’(인터넷소설)로 대히트를 친 사실을 숨긴 채 출판사 대표로 살아간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소’ 세계 ‘천양시’로 빨려 들어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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