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을 추억하는 죄 용서하지 마셔요 [이경자 칼럼]

한겨레 2024. 5. 2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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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뢰와 의지의 마음으로 저는 선생님의 인생 전체로 들어갈 결심을 했습니다. ‘시인 신경림’을 쓰기로 작정하고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 선생님은 사치를 모르신다. 길음시장에서 싸구려 바지와 셔츠를 사 입으시고 정릉 가는 길 삼거리에 있는 봉화묵밥 집에서 몇천원짜리 식사를 하신다.

이경자 | 소설가

봄은 다 보내고, 불기운이 가득한 날 이른 아침에 선생님께선 지구별을 떠나셨습니다. 오래도록 선생님의 건강을 살핀 서홍관 시인이 보낸 ‘오늘 아침 8시17분’이란 글자를 확인한 순간 야윈 제 가슴이 덜컥, 소리도 못 내고 심장이 내려앉았습니다. 저희에겐 상실과 슬픔이 닥쳤지만, 선생님의 영혼은 이미 평화와 자유에 드셨을 거라 느껴졌습니다. 이 가엽고 복잡하고 거칠고 약한 나라에서 너무도 그리셨던 그 평화와 자유를.

선생님께서 당신보다 더 아끼던 따님이 호스피스 병동에 계신 선생님의 소식을 전해주며 ‘그래도 의식이 있으실 때 만나시는 게 좋겠다’고 해줬을 때, 그날 저녁에 병실에서 만난 선생님. 기적처럼 병마(病魔) 같은 건 훌훌 털고 일어나실 걸 기대해봤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당신과 함께 늙어간다는 근처의 봉화묵밥 할머니와 며느리의 솜씨로 만든 묵밥과 국수를 함께 드실 수 있는 기회를 상상했습니다.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잘 안 나왔지만 ‘선생님, 훌훌 털고 벌떡 일어나 저랑 정릉을 산책하셔야죠!’ 제가 말했을 때, 선생님께선 그래, 대답하시고 빨리 돌아가라고 손으로 밀어내는 표시를 하셨습니다. 제가 이 지구에서 들은 마지막 목소리. ‘그래’.

그래…. 선생님은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은 시인, 저는 소설가. 그렇지만 장르가 달라서 만나는 것이 좀 더 편했습니다. 불타버린 양양의 물갑리 집에 다른 분들과 함께 오셔서 밤새 술도 마시고, 그 불탄 집 대신 제가 몇년 전에 양양 고향집 근처에 아주 작은 집을 장만했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사람으로 얼마나 아껴주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만나실 땐 제가 행여 찻값이라도 낼까, 미리 카드를 꺼내시고 계산대 앞에 서 계시지요. 당신께서 수입이 얼마나 많으신지, 일부러 저를 덜 미안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신뢰와 의지의 마음으로 저는 선생님의 인생 전체로 들어갈 결심을 했습니다. ‘시인 신경림’을 쓰기로 작정하고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선 조금 의아하거나 믿음이 덜 가셨을 수도 있었을 것. ‘저를 믿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대선배이신 시인 신경림을 취재했습니다.

막내를 낳고 세상을 먼저 떠난 아내. 집안에는 병든 할머니와 아버지 두 분. 어머니를 잃은 어린 자식 셋. 다행히 선생님껜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하지만 가난은 선생님의 생활 자체.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출판사에서 일하기도 하셨지만 거의 전업 시인으로 사셨습니다. 군부독재 시절, 유신정권은 ‘불온한 시인’으로 낙인을 찍어 ‘요시찰 인물’이 되셨고 지역의 경찰서 정보과 형사는 선생님 댁으로 출퇴근했답니다. 그 시대 형사의 눈에도 신경림 시인은 좋은 사람. 아침이면 선생님 댁으로 출근하는 형사가 소주나 막걸리에 안주가 되는 두부 같은 걸 사 들고 왔다고.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셨지만 술 마실 돈은 없어서 어떻게 하면 공짜 술을 마실 수 있을까, 궁리하고 찾아가고 만나고. 그래도 얻어 마신 술이 성에 차지 않아 맨정신이 남아 있으면 돈암동에서 내려 미아리고개를 걸어서 넘어와 길음동 시장 끝자락에 간판도 못 단 술집에서 외상술을 마시고 또 외상값을 갚는다고 가서 다시 외상술을 마시던 집이 있었죠. 그 집의 딸이 결혼할 때 지어준 시.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신경림은 몰라도 이 시의 한 구절은 누구나 알 것.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예순의 나이가 되었을 때, 선생님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종이로 된 돈이 짚였다고. 그 손의 감각을 통해 당신의 삶에서 그림자를 거둔 극단적 가난. 그 감각을 말씀하실 때 선생님의 목소리는 아득하고 짐짓 포근했다. 그러나 이 시절로 오기 전에, 진흙투성이의 길음시장 빈민촌. 그 어느 집은 4년 전까지 남아 있었다. 잠만 자면서 그 집의 아이를 가르치던 때, 안암동 채석장에서 가져온 돌을 아주 납작하게 갈며 살던 그 집. 선생님과 점심을 먹고, 우산도 펼칠 수 없이 비좁게 처마를 맞댄 골목에 들어서서 기억을 더듬어 새삼 찾아낸 ‘그 집’.

선생님은 사치를 모르신다. 길음시장에서 싸구려 바지와 셔츠를 사 입으시고 정릉 가는 길 삼거리에 있는 봉화묵밥 집에서 몇천원짜리 식사를 하신다. 어쩌다 비싼 등산복이나 근사해 보이는 모자를 쓰시는데 오랜 술벗인 후배 ‘쫑관’이가 사 준 것이라고 으쓱해하셨다.

그 선생님. 검소와 소박함이 몸에 밴 선생님께서 10여년 전부터 비싼 고기와 장어를 드시기 시작했다. 내게도 그런 고단백질을 사 주셨다. 전화해서, 장어 먹자! 굵지만 맑은 음색의 목소리로. 암 수술하고 회복하신 뒤로 선생님은 아주 특별하지 않으면 술을 마시지 않으셨다. 글 쓰는 후배들이나 친지분들이 내게 선생님의 안부를 묻고 만나기를 청하기도 했다.

“선생님. 왜 저한테 선생님의 안부를 묻고 만날 수 있나 알아봐달라고 하지요? 제가 선생님하고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선생님은

“살림을 합치지 않았다고 해!”

농담하셨다. 유쾌하고 즐거운 농담.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는 이유.

선생님은 가부장적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권력으로 만들지 않는다.

거짓으로 치장하는 것, 좋아하지 않으신다. 오래도록 가까이서 지내며 나는 단 한번도 나를 성적으로 훑어보거나 건드려보는 걸 경험하지 못했다. 애당초 그저 사람인 사회적 관계에 익숙한 분. 신경림 선생님. 몸이 아픈 따님을 걱정하고 잘 자라는 손녀 손자를 자랑하시던 선생님. 정릉 근처에 모두 모여 산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시 ‘낙타’ 중에서)

인사동과 작가회의 사무실들이 있던 곳. 출판사들. 정릉천 개울길, 길음동과 정릉의 골목들, 북한산 자락과 등성이에 남겨놓으신 자취들. 아마 길가의 풀이나 벌레들, 나무들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그 기억에 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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