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찬양 논란 평양 연설... 文 “민족 자존심·불굴 용기 표현 내가 넣었다”

이하원 외교담당 에디터 2024. 5. 2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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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의 외교 프리즘]
문재인 전 대통령 회고록, 2018년 9월 ‘북 찬양’ 논란 연설도 소환
“평양 발전 놀라워...민족 자존심 지키는 불굴의 용기 보았다”고 연설
“보수층 못마땅하게 느낄 수 있지만 해야 한다고 생각해 무릅쓰고 했다”

지난주에 발간된 문재인 전 대통령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정권의 정신적 포로가 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655페이지 전체에 걸쳐서 북한에 경도된 시각을 보여줬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그의 회고록의 기조는 ‘미국에 대한 불만과 북한의 비핵화 의지 대변’ 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이나 한국의 극우 세력들은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북한을 무너뜨리는 것이 궁극의 목표이기 때문에 제재 완화가 논의되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반대로 후회를 한다”며 “제재 해제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노력했어야 하지 않았나”라고도 합니다.(128페이지)

그는 김정은의 입장을 대변하려고 노력합니다. “김 위원장이 누누이 그런 표현을 썼다. 핵은 철저히 자기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사용할 생각 전혀 없다. 우리가 핵 없이도 살 수 있다면 뭣 때문에 많은 제재를 받으면서까지 힘들게 핵을 머리에 이고 살겠는가. 딸 세대한테까지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 없는 것 아니냐. 그렇게 비핵화 의지를 나름대로 절실하게 설명했다.”(191페이지)

문재인 대통령이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2018년 9월 19일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입장,인사하고 있다./연합뉴스

◇북한 체제 찬양하는 듯한 2018년 평양 연설

문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는 이뿐만 아니라 2018년 9월 19일 능라도 5·1 경기장 연설관련 부분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당시 자신을 ‘남쪽 대통령’이라고 소개하며 마치 북한 체제를 인정하고 ‘찬양’하는 듯한 연설을 해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5페이지에 걸쳐 언급해 놓았습니다.

그는 먼저 “남쪽 대통령으로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소개로 여러분에게 인사말을 하게 되니 그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압도적인 군중이었고, 압도적인 함성이었다”며 “동원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엄청난 환영을 받은 것이다. 그 많은 평양 시민과 처음 대면하는 것이어서 가슴이 벅찼다”고 했습니다.(300페이지)

이번에 그의 회고록으로 다시 소환된 5·1 경기장 연설에서 가장 크게 논란이 됐던 부분은 다음의 네 문장입니다. “이번 방문에서 나는 평양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았습니다.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습니다. 얼마나 민족화해와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지 절실하게 확인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북한에서 생활수준이 월등하게 높은 평양에서도 아사(餓死)하는 사람이 나오는 실상을 외면하고, 김일성 일가 전체주의 사회를 찬양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동족을 살해하는 6·25남침이나 각종 미사일 실험과 핵무장으로 도발해 온 북한을 피해자로 인식하며 북한 체제를 칭송하는 발언을 어떻게 대한민국 대통령이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남쪽 대통령이라니’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한 김영우 전 의원은 “북한은 2021년 1월 제8차 당 대회 때 개정된 당 규약에 (중략) 최종목적은 인민의 리상(이상)이 완전히 실현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다”며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이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회주의와 최종 목적인 공산주의 사회건설에 동의라도 한다는 말인가”라고 비판했습니다.

◇경제제재 받는 북한 격려하고 싶었다는 문 전 대통령

그럼에도 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북한이 경제 제재를 겪으면서 받는 여러 어려움과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을 격려하고 싶었다”며 “그래서 ‘어려운 시절’, ‘민족의 자존심’,’불굴의 용기’ 같은 표현을 내가 직접 넣었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의 메시지는 비핵화, 핵 없는 한반도였는데 평양 시민들에게 감성적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감성적인 표현 가운데 평양 시민들의 어려움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격려하는 부분은 우리 보수층은 못마땅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무릅쓰고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무릅쓰고 한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청와대 일부에서도 5·1 경기장 연설문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반대했지만, 그가 강행했음을 시사합니다. 그 결과, 김정은이 평양 주민 15만명을 모아놓은 곳에서 ‘전략적 환대’ 분위기에 취해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전체주의를 찬양한 것으로 읽히는 연설을 하고 만 것입니다. 북한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생활조차 못해 체제 변화를 갈망하는 북한 주민들은 문 전 대통령 연설을 전해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문 전 대통령이 이같이 정성을 들였지만, 김정은과의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한반도 정세가 자신들의 마음대로 풀려나가지 않자 문 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옵니다. 그중에서 압권은 2020년 6월 평양 옥류관 주방장을 내세워 원색적으로 비난한 겁니다. 문 전 대통령은 2018년 9월 방북 당시 옥류관에서 환영 오찬을 할 때 평양냉면을 먹었습니다. 김정은이 같은 해 4월 그의 첫 남북 정상회담장에 옥류관 평양냉면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이를 기억하고 북한은 그 옥류관 주방장을 내세워 “평양에 와서 옥류관 국수를 X먹을 때는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전혀 한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일개 요리사를 내세워 비난한 것이지요.

◇북한은 하노이딜 이후 원색적으로 文 비난

같은 시기에 북한 외무성은 “남조선은 팔삭둥이 맹물 마시고 트림하듯 비핵화라는 개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합니다. 장금철 통일전선부장은 “청와대가 위기를 모면하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지만 신뢰는 산산조각이 났다.(문재인 정부가) 무맥무능했기 때문에 북남 관계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이제부터 흘러가는 시간들은 남조선 당국에 있어서 참으로 후회스럽고 괴로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후에도 김정은 북한 정권은 자신들을 충실하게 대변해온 문 전 대통령을 ‘삶은 소대가리’ 등의 표현을 쓰며 비난해왔습니다. 2020년 김정은 동생 김여정의 비난은 가장 강도가 강합니다. ‘철면피한 감언리설’ ‘뻔뻔함과 추악함’ ‘정의로운 척, 온갖 잘난 척하며 평화의 사도처럼 처신머리 역겹게 하고 돌아가니그 꼴불견’ 이라고 합니다.

유성옥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이사장은 북한이 입장을 180도 바꿔 문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배경을 이렇게 분석한 바 있습니다. ” (문 전 대통령은) 북한에 과도한 기대를 갖게 했다. 문재인 정권 사람들은 사석에서 ‘우리는 미국 눈치를 안 본다. 우리 민족끼리 한다. 금강산ㆍ개성공단 재개하겠다’고 (북한에) 장담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하노이 회담 전에 국정원 실세 A씨가 북측 인사를 만나 ‘영변 핵시설만 폐쇄하면 제재가 풀린다’고 언질을 줬다. 정상회담에서 그 조건을 제시하자 트럼프가 협상을 깨버렸다. 김정은은 문 정권의 허풍에 사기를 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김정은은 문 전 대통령에 사기를 당했다고 보고, 이후 원색적인 비난을 해가며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는데, 이번 회고록 파동을 보면 문 대통령은 아직도 그런 김정은 정권에 미련이 많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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