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르고 소화기 파나”…선진국들, 기후지원금 ‘고금리 대출 장사’

신기섭 기자 2024. 5. 23. 13: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개도국에 연 6% 육박 금리 차관 제공
무상 원조도 자국 인력·제품 구입 강요
2022년 9월 대규모 홍수가 발생한 파키스탄 남부 신드주에서 주민들이 가재도구 등을 들고 대피하고 있다. 신드주/AP 연합뉴스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에 대한 기후변화 지원금의 상당 부분을 고금리의 차관으로 제공함으로써 ‘대출 장사’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상당 규모의 무상 원조도 자국의 인력과 제품을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제공함으로써, 원조를 통한 이익 챙기기 행태까지 보였다.

로이터 통신은 22일(현지시각) 미국 스탠퍼드 대학 언론 프로그램 ‘빅 로컬 뉴스’와 공동으로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선진국의 기후변화 대응 지원금 관련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자료 4만4천여개를 분석한 결과, 선진국들이 개도국 지원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익을 챙겼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선진국들이 개도국에 제공한 기후변화 관련 차관 중 180억달러(약 24조6천억원)에 시중 금리를 적용함으로써 거액의 이자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가운데 102억달러는 일본이 제공한 것이었다. 프랑스, 독일, 미국의 고금리 차관 규모는 각각 36억달러, 19억달러와 15억달러였다. 이들 4개국은 개도국 기후변화 대응에 가장 많은 자금을 제공한 나라들이다.

프랑스가 2017년 기후변화 대응 명목으로 에콰도르의 케이블카 건설을 위해 빌려준 1억1860만달러의 사업 초기 예상 대출 금리는 5.88%에 달했다. 이는 2020년 12개 선진국과 유럽연합(EU)이 개도국들에 지원한 장기 저리 차관(양허성 차관)의 평균 금리 0.7%의 8배에 달하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고금리가 아닌 차관에도 자국 인력을 채용하거나 상품을 구입하는 조건을 부과하는 일이 많았으며, 이런 조건부 차관 규모는 110억달러였다. 조건부 차관의 대부분은 일본이 제공한 것이었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이를 통해 일본 경제가 회수한 액수는 108억달러에 달했다.

선진국들은 무상 원조에 인색한 모습도 보였다. 프랑스와 일본의 전체 지원금 가운데 무상 원조는 각각 4.9%와 6%에 불과했다. 독일과 미국의 무상 원조는 각각 전체의 40%와 48%였다.

안드레스 모그로 전 개도국 기후변화 협상 대표는 “이는 건물에 불을 지른 뒤 소화기를 파는 격”이라며 “개도국들은 기후 금융으로 초래된, 새로운 빚더미의 물결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진국들은 무상 원조를 통해서도 자국의 이익을 철저히 챙겼다. 24개국과 유럽연합이 2015년부터 6년 동안 제공한 원조 가운데 적어도 106억달러는 자금 제공국 기업 등의 인력을 채용하거나 자국 기업 제품 구입 조건이 붙은 것이었다.

프랑스 개발청은 2022년 연차 보고서에서 그 해 시행한 기후변화 지원 프로젝트의 71% 이상에 프랑스 경제 주체들이 관여했으며 이를 통해 얻은 경제적 이익이 20억유로(약 2조9600억원)라고 밝혔다고 통신은 전했다.

선진국들의 자국 인력과 기업 활용 강요는 이익 챙기기에 그치지 않고 개도국의 지속 가능 기술 축적 기회까지 박탈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에리카 레넌 국제환경법센터(CIEL) 선임 변호사는 이런 행태는 “기술 이전과 (개도국의) 역량 구축”을 우선시한다는 2015년 파리 기후 협정과 모순되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선진국들의 기후변화 차관이 저소득 국가보다는 외채에 시달리는 중소득 국가에 집중돼, 외채 위기의 악순환을 유발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저소득 국가에 대한 지원금은 차관 15억달러 등 모두 121억달러인 반면, 중소득 국가에 대한 지원금은 차관 852억달러 등 1265억달러에 달했다.

선진국들은 개도국 지원금을 최대한 늘리려면 차관 형식의 지원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매출이 발생하는 사업에 대해서는 차관이 “적절하며 비용 효율적인” 지원 방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차관이 불가피하더라도 장기 저금리의 ‘양허성 차관’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영국 싱크탱크 ‘국제 환경개발연구소’의 리투 바라드와즈는 선진국의 고금리 차관은 ‘나쁜 차관’의 고전적인 사례라며 “이는 기후 금융의 탈을 쓰고 재정적 압박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