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어렵고 상속자격 없어… 비혼에게 높은 ‘제도 장벽’[‘가족’이 달라진다]

김린아 기자 2024. 5. 23.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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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 달라진다 - (中) 法 사각지대 놓인 비혼 커플
신혼부부 아니라 대출에 제약
“결혼 강제당하는 것 같아 좌절”
佛, 1999년‘팍스’로 법적인정
30년째 동거중인 블론데 커플
“주거·세제·육아 불이익 없다”
4년차 동거 지난 2021년 10월부터 ‘동반 서약서’(작은 사진)를 작성하고 3년 넘게 동거 중인 윤모(여·27)·송모(30) 커플이 지난 4월 영종도 여행에서 찍은 사진.

4년 차 ‘비혼 동거 커플’인 윤모(여·27)·송모(30) 씨는 상대와 상대의 가족이 ‘친족’으로 얽혀 과도한 책임을 부여하는 결혼 제도가 부담스럽다. 오직 혼인과 출산만으로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현 제도가 구시대적이라고 느껴 비혼(非婚) 동거를 택했다. 두 사람은 생활비 통장을 만들고 각자 공평하게 금액을 넣어 공동 생활비로 지출한다. 집안일도 분담하고 서로의 부모님을 종종 뵈며 가족 모임도 한다. 겉으로 보면 다른 혼인 부부들과 다를 바 없지만 비혼 동거 커플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좌절감을 느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지난 4월 집주인으로부터 주거 지역이 재개발된다는 이유로 한 달 내에 집을 빼라고 통보받았다. 새집으로 이사해야 했고, 전세 자금 대출을 알아봤지만 미혼이라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었다. ‘세대주’인 윤 씨가 전세 자금 대출 자격이 안 됐는데, 송 씨도 ‘동거인’ 신분이어서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 만약 두 사람이 법적 부부였다면 송 씨가 배우자로서 세대주에 준하는 지위를 받아 대출이 가능하다. 이들은 상속법에 따라 직계 가족이 유산에 대한 우선순위를 가진다는 것을 알고, 따로 사망보험을 들고 서로를 수익자로 설정하기도 했다. 동거 기간 함께 축적한 재산을 나누고 싶었다.

두 사람은 23일 “비혼 동거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프랑스 ‘팍스(PACS·시민연대계약)’와 같은 제도가 한국에도 필요하다”며 여러 차례 강조했다. 윤 씨는 “이러한 장애물 때문에 동거 커플들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강제’당하는 건가 싶어 화도 나고 상실감도 들었다”고 말했다. 송 씨는 “부모님도 우리의 동거를 존중하고 있다”며 “동거하는 젊은 커플이 많은데 그들을 보호하는 법 하나 없이 모두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1999년 프랑스는 결혼하지 않은 동거 커플에게도 결혼과 유사한 법적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팍스를 도입했다. “팍스로 인해 행복하게 연애하고 탄탄한 가정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게 ‘팍스 커플’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30년째 동거, 15년째 팍스 커플로 지내는 피에르 블론데(59)·헬레네 블론데(여·58) 씨는 “팍스가 결혼 못지않게 주거·세제 혜택을 제공해 큰 불편함 없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1994년부터 동거를 시작해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고 기르다, 큰아들이 16살이 되던 2010년 팍스를 맺었다. 블론데 커플은 “복잡한 혼인 관계를 맺는 것보다 간단히 팍스를 등록하는 게 낫다고 느꼈다”며 “아이를 키우다 보니 팍스로 등록해 대출 혜택을 받아 주거비를 줄이고 싶었고, 둘 중 한 사람이 사망했을 때 유산을 동반자에게 1순위로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는 팍스가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인 만큼 이들 밑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법적으로 차별받지 않는다. 2020년 기준 프랑스의 비혼 출산율은 62.2%에 달한다. 블론데 커플의 막내아들 루카 블론데(25) 씨는 “프랑스에서 부모의 혼인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며 “나 또한 팍스를 선택할 의향이 있다”고 전했다.

팍스를 결혼의 징검다리로 활용하는 커플도 있다. 프랑수아 베르리(25) 씨는 2022년 6월 여자친구와 팍스을 맺은 후 3년째 동거하며 결혼을 준비 중이다. 그는 “정식 부부가 되기 전에 두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건지 배우고 관계에 대한 책임감도 기를 수 있었다”며 “프랑스 젊은이들 사이에서 팍스는 약혼처럼 결혼을 향하는 첫 단계”라고 말했다.

2020년 11월부터 1년간 팍스 커플로 지냈다는 유승일(40)·안젤리나 멘데스(여·29) 씨는 유 씨의 가정 일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결혼을 서둘렀다고 한다. 국내에는 팍스 같은 제도가 없는 탓이다. 유 씨는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의료 혜택 등을 전혀 보지 못하다가 연인과 팍스를 맺은 덕에 수월하게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는 “법적인 문제로 결혼, 이혼이 어려운 한국 사회와는 달리 남녀의 자연스러운 동거를 허용하는 팍스 덕분에 프랑스의 출산율이 늘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시대가 변한 만큼 ‘한국판 팍스’가 필요하고, 도입된다면 출산율을 올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린아·노지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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