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의 벽 없는 테크기업, 비자의 벽은 여전히 높다
(4) 테헤란벨리 스타트업 직원
“한국은 일본 등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열려 있는 기업 문화, 탄탄한 아이티(IT) 인프라, 우수한 의료 시스템 등이 돋보인다.
미국·유럽의 인재들이 가장 먼저 고려하는 곳이 한국이다.”
(신디 박 서울로보틱스 인사팀장)
세계 시장을 겨누는 국내 스타트업들이 외국 인재 영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 일대에 집결해 있는 스타트업에선 외국인 임직원을 흔히 볼 수 있다. 산업용 자율주행 소프트웨어(SW) 기업 ‘서울로보틱스’는 임직원 55명 중 23명이 외국인이다. 특히 엔지니어 30여명 가운데 약 40%가 독일 뮌헨공대(TUM),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ETH), 스웨덴 왕립공과대(KTH) 등을 나온 외국인이다. 인사팀장도 독일인이다.
“회의도, 고객 지원도 영어로…세계 진출에 큰 힘”
지난 14일 서초구 반포대로에 위치한 서울로보틱스 사옥을 찾았다. 1층 통유리 회의실에선 영어로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회의 뒤 기자와 만난 이 회사 사업개발팀 에반 토마스는 “베엠베(BMW)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고객사다. 고객사들은 엔지니어도 바로 영어 서명이 가능해 고객 지원이 빠르다는 점을 우리의 강점으로 꼽는다”고 말했다. 이 회사가 지난해 벌어들인 매출 30억원 가운데 80%가 국외에서 나왔다.
국외 진출을 노리는 에듀테크 기업 데이원컴퍼니(옛 패스트트랙아시아)도 외국인 직원이 ‘선봉장’이다. 이 회사는 온라인 교육 플랫폼 ‘패스트캠퍼스’로 국내에서도 이름을 얻고 있다. 데이원컴퍼니는 ‘가벼운학습지’로 대박을 치며 2022년 매출 360억원을 올렸다. 일본에 진출한 스타트업 ‘레모네이드’, 한국·미국·일본·대만에서 전문가용 교육 플랫폼을 운영 중인 ‘콜로소’를 사내 기업(CIC)으로 거느리고 있다.
레모네이드 사업운영 파트장으로 데이원컴퍼니의 일본 사업을 총괄하는 이는 영국 글로스터셔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토종 영국인 앤드루 켐프스터다. 그는 “2002년 월드컵 덕분에 한국을 알게 됐고, 2012년 영어를 가르칠 계획으로 한국에 왔다가 제안을 받아 진로까지 경영으로 바꾸게 됐다”고 말했다. 데이원컴퍼니의 대만과 인도네시아 시장 진출도 외국인 직원들이 중심을 이뤄 탐색 중이다. ‘콜로소’의 국외 사업을 맡고 있는 시오 마리아(미국) 글로벌 마케팅 파트장은 미국 플로리다국제대학에서 경영정보시스템을 전공한 뒤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어” 한국에 들렀다가 뿌리를 내린 사례다.
국외 진출 이끌지만…“고학력 사무직도 비자 받긴 어려워”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전문인력의 수는 2013년 4만1천명에서 2023년 4만6천명(E1~E7 비자 발급 기준)으로 10년 새 5천명가량 늘었다. 해당 비자를 받기 위해선 전문 자격증, 석사 이상 학력, 수년의 근무 경험이 필요하다. 법무부·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 기준 전문 분야 종사자 74.8%가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갖췄고 30대(45.5%)가 전체의 절반 가까이에 이른다. 월 300만원 이상 버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전문인력(43%), 영주권자(40.3%)가 대다수다.
기업 현장에선 비자 발급 조건을 조금 낮추면 외국인 전문인력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란 목소리가 적지 않다. 미국인인 재닛 러셀 레모네이드 콘텐츠 개발자는 “교사나 학생과 달리, 처음부터 이(E)-7 비자를 받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며 “수습 기간 없이 처음부터 정규직으로 초청해야 한다는 데 기업의 부담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장기 정착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콜로소의 일본시장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케모토 미유키는 거주(F-2) 비자로 전환하기 위해 ‘주경야독’했다고 했다. “전문인력 비자 보유자가 일정 기간을 채우면 나이나 연봉, 학력 등을 점수화해 일부에게만 거주 비자를 줍니다. 석사를 한국에서 나와야 유리한데, 전 일본에서 졸업한 뒤 왔기 때문에 점수가 부족해 50시간의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받았어요. 회사를 다니면서 토요일 저녁까지 수업을 듣고, 한국어능력시험(토픽)도 공부했죠.”
한국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이들은 이직·실직에 영향을 받는 ‘특정활동 비자’(E-7 비자)보단 거주 비자를 선호한다. 인공지능 영상편집 소프트웨어 브루(Vrew)로 유명한, 스타트업 보이저엑스의 개발자 카일 로빈슨(캐나다)은 “이-7 비자로 왔지만, 이직할 때 면책 서류에 서명받는 게 쉽지 않아 새 비자를 받을 때까지 한국을 떠난 친구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캐나다 워털루대학에서 컴퓨터 공학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7 비자를 비교적 쉽게 받았지만, “보다 자유로운” 거주 비자로의 변경을 준비 중이다. 한국학을 전공하고, 정부초청 장학생으로 한국에 왔다는 같은 회사 제프리 야우(영국)는 “많은 능력 있는 친구들이 꿈을 품고 한국에 왔지만 직장을 얻지 못해 돌아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며 “첫 직장을 구했을 때가 한국에 온 뒤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대학 때 교환학생이나 정부초청 장학생으로 온 경험이 한국에 정착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도 전했다. 로빈슨은 “대학생일 때 교환학생 기회를 잡았는데, 싱가포르는 지원자가 너무 많다며 학교에서 한국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효율적인 한국 문화 매력”…“납세·병원 등 영어 지원 아쉬워”
‘오래 살 나라’로 한국을 점찍은 만큼 아쉬움도 크다고 한다. “한국인과 결혼하면 정착이 쉬운 편인데, 미혼자는 예외인 것 같다.(웃음) 세금을 내는 외국인에겐 코로나 때 재난지원금을 줬는데, 1인 가구라서 해당 안 된다고 했다.”(이케모토) “세금 내러 세무서에 갔더니 ‘온라인으로 할 수 있어요’라고 안내를 받았는데 정작 영어 안내문은 없더라고요. 가끔 어떤 사이트는 외국인 이름을 다 입력할 칸이 부족하기도 해요.(웃음) 병원에도 영어 안내문이 있으면 좋겠어요.”(러셀) “월세 대출 받기가 사실상 불가능했고, 전세 대출도 2억원 제한이 있다고 했다. 많은 북미권 학생들처럼 저도 수천만원의 학자금 대출을 아직도 갚는 처지인데, (거주 문제가) 한국으로 선뜻 오기 힘든 이유일 것이다.”(로빈슨)
켐프스터는 “한국은 24시간 일하는 것 같다. 저녁엔 업무용 메신저를 보지 않는 영국과 다르다”면서도 “다음날 했다면 오래 걸렸을 일을 몇분 만에 처리하기도 해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생활이든 업무든 편리하고 인프라가 훌륭한 나라다. 도심 곳곳에 뻗어 있는 지하철 인프라는 특히 최고”라고 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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