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숨은 명산 희아산] 손오공도 탐낼 복숭아 산지…저 멀리 지리산이 훤하네

김희순 광주샛별산악회 산행 고문 2024. 5. 23.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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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순천 희아산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용산재
월등의 4월은 분홍색 이불을 편 것처럼 복사꽃 대궐이다.

어여쁜 이름에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희아산戱娥山(774.2m). 전라남도 순천시와 곡성군을 가르는 이 산은 이름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있진 않다. 눈길을 확 잡아끄는 암릉도 없다. 능선엔 굴참나무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는 전형적인 육산의 산세다. 일부 구간이 호남정맥에 걸쳐 있다.

반면, 겨울을 나고 봄을 맞이한 희아산은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산꾼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희아산으로 둘러싸인 순천 월등면 일대는 3월이면 하얀 매화, 4월이면 분홍색 복사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이 시기의 희아산은 사진작가들로 북새통이다. 5부 능선에서부터 크고 작은 마을까지 희아산 일대가 꽃 이불 덮인 풍경으로 완전히 탈바꿈한다. 7~8월이 되면 희아산 주변의 월등면은 '월등 복숭아' 생산지로 다시 한 번 활기를 띤다.

월등면은 희아산을 비롯해 삼산(772m), 점토봉(600m), 문유산(687.5m), 바랑산(619m) 등 높은 산들이 성벽처럼 감싸고 있는 분지 지형이다. 물이 부족한 탓에 농경지로는 적합하진 않지만, 큰 바람을 막아 주는 산과 배수 잘되는 완만한 산비탈 덕에 복사나무가 잘 자라는 최적의 환경이다.

점터봉 근처에서 바라본 희아산 주능선.

이름 없는 의병장들이 활동하던 곳

월등면에서는 1930년대부터 복숭아를 심기 시작했다. 현재는 28개 자연마을의 약 90%가 과수농가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복숭아는 "손오공도 훔쳐 먹고 싶을 만큼 달콤하고 맛있다"고 주민들은 자랑한다. 복사꽃을 보는 것이 목적이라면 문유산과 바랑산으로 이어지는 11km 산행코스도 좋다.

희아산과 삼산, 비래봉(694.2m)으로 이어지는 길은 역사 인물 탐방로나 다름없다. 비래봉 아래 곡성군 목사동면에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용산재가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으며 장군의 태를 묻었다는 단소와 동상이 함께 있다. 용산재가 위치한 곡성군 목사동면은 신숭겸 장군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신숭겸은 평산 신씨 시조다. 태조 왕건이 신숭겸과 함께 황해도 평산에서 사냥하던 중 그의 궁술에 감탄해서 평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姓을 내렸다고 한다. 927년 후백제 견훤과 고려, 신라 연합군은 대구 공산公山에서 치열한 전투를 한다. 왕건이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이 기지를 발휘해 왕건의 갑옷을 바꿔 입고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후 신숭겸은 자신의 희생으로 왕을 살린 충절의 표상이 되었고, 삼산, 비래봉, 화장산(524.2m) 일대에는 그와 관련된 여러 전설과 무용담이 전해진다.

고려개국 공신 신숭겸 장군을 모신 용산재. 

희아산과 삼산은 보성강(대황강)과 섬진강이 감싸고 있다. 보성강에는 신숭겸 장군길이, 섬진강에는 조선 초, 태종 이방원이 가장 신임했던 무장 마천목 장군을 기념하는 길이 있다. 희아산은 여러 충신과 의병장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구한말, 삼산과 섬진강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노임수를 비롯해 신정백, 신정우, 공성찬, 유병기와 같은 의병장을 꼽을 수 있다.

희아산은 물이 귀한 산이다. 용산재까지 가려면 식수를 넉넉히 준비하는 것이 좋다. 다행히 크게 위험한 구간은 없다. 노고치에서 닭봉까지는 호남정맥 구간이고 이정표가 잘 설치되어 있다. 다만, 이정표에 표기된 거리는 오차가 심해 신뢰할 수 없다. 들머리인 노고치는 순천시 승주읍 도정리와 월등면 운월리를 넘나드는 고갯마루로 호남정맥 문유산의 초입이기도 하다. 화장실이나 편의시설이 전혀 없고 곧장 언덕을 치고 올라간다.

노고치부터 희아산 정상까지는 4km 거리다. 10분 정도 숲길을 지나면 덕암사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은 공사로 인해 등산로가 평지처럼 변해 있다. 오른쪽 임도 옆 언덕으로 올라서면 선명한 등산로가 나온다.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수곡리 편백숲.

원통굴재 구간은 등산로 정비 필요해

훈련봉(634m)까지는 코를 땅에 박을 정도로 급한 경사길이 이어진다. 이후로도 자잘한 오르내림이 반복되지만 크게 힘들지는 않다. 등산로 옆으로는 철쭉과 굴참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어 시야가 막혀 있다. 닭봉(740m)은 커다란 밤나무가 지키고 있고, 헬기장이 있는 평평한 봉우리다. 잡목이 많아 주변 풍경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닭봉에서 호남정맥과 작별한다. 호남정맥은 서남쪽으로 꺾어 내려가며 유치산(532.7m)으로 이어진다. 건너편 수직 암릉은 뱃바위로 왕복 30분이면 다녀올 수 있다. 희아산 정상엔 조그마한 정상석과 고사목이 있다. 불과 5~6년 전까지만 해도 우람하던 소나무의 자태가 초췌하게 변했다. 이곳 역시 잡목 때문에 특별한 조망은 없다.

월등 복숭아로 만든 '복 막걸리'.

원통굴재(631m) 이정표 직전 100여 m 구간은 가시넝쿨이 많은 사나운 길이다. 이곳만 지나면 무난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삼산三山은 목사동면의 진산이며, 정상은 최고의 조망 터다. 희아산에서 보지 못했던 것까지 보답하듯, 지리산 주능선까지 시원하게 보이는 웅장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끝이 아니다. 곡성 봉두산을 비롯해, 광양 백운산, 지리산 서쪽으로 화순 모후산, 남쪽으로 조계산까지 끝없이 조망된다.

삼산에서 비래봉을 지나 용산재로 하산하는 길은 썩 좋지 않다. 수곡리 임도를 통해 곧장 내려갈 경우, 편백나무 군락지를 지나 30분 정도면 마을에 닿을 수 있다. 수곡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에는 별 다른 이정표가 없다. '용산재 4.0km' 이정표 직전에 왼쪽으로 꺾어야 한다.

용산재 이정표 길목에 정성을 들인 커다란 봉분이 눈에 띈다. 영화 '파묘'의 영향일까? 좌우로 산이 감싸고, 비래봉의 기운이 흐르는 명당이라는 생각이 든다. 용산재로 내려와 신숭겸 장군 동상과 마주한다. 신숭겸 장군이 살신성인으로 실천한 충의 마음을 가슴속에 되새겨보며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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