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사각지대 놓인 ‘가족돌봄 청소년’ 짐 덜어준다
질환-장애 가족 돌보는 34세 이하… 도움 받을 수 있는지조차 몰라
10명 중 4명꼴 “복지 경험 없다”… 올해부터 전담 지원체계 시범 사업
월드비전, 카톡서 익명 상담 제공… “지원 대상 인지하고 도움 요청을”
직장인 김율 씨(30)는 중학교 3학년 때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간병하며 집에서 가장 역할을 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정신질환을 앓던 아버지는 이마저 거부했다.
생활비가 없어 집에 가스와 전기가 끊기기 일쑤였고 급식비 낼 돈조차 없어서 배식 봉사활동을 하며 끼니를 해결했다. 김 씨는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집이 싫었다”며 “아버지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자주 폭행해 경찰에 신고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고교를 졸업한 뒤 집을 떠났다. 하지만 4년 후 아버지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중환자실에 입원하면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오랜만에 찾은 집은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고 돌이켰다.
● ‘사실상 가장’인 가족 돌봄 청소년
34세 이하이면서 김 씨처럼 중증질환이나 장애, 정신질환 등이 있는 가족을 돌보고 있거나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 가족 돌봄 청소년·청년으로 분류된다. 정확한 규모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가족 돌봄 청년의 경우 국회입법조사처 자료에 따르면 최대 30만 명으로 추산된다.
보건복지부가 2022년 발표한 가족 돌봄 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돌봄 부담이 과중한 탓에 가족 돌봄 청년의 우울감 유병률은 약 61.5%로 나타났다. 이는 일반 청년(8.5%)에 비해 7배가 넘는 것이다. ‘삶이 불만족스럽다’는 응답(22.2%)도 일반 청년(10%)의 2배가 넘었다.
또 가족 돌봄 청년 10명 중 4명은 돌봄 지원 등 어떤 복지 서비스도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 돌봄 청년의 40.7%는 의료비나 생계비 지원 등 현금성 복지 지원을 이용해 본 경험이 없었고, 47.3%는 가정 방문 돌봄 등 돌봄 서비스를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다시 만난 아버지를 살뜰히 보살피고 있다는 김 씨 역시 “청소년기에 단 한 번도 외부 지원을 받은 적이 없었다”며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에게 무엇보다 ‘너 자신의 인생을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 “내가 가족 돌봄 청소년인지 몰랐다”
정부와 사회복지단체 등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건, 가장 역할을 맡은 이들이 스스로 가족 돌봄 청소년·청년에 해당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조수정(가명·21) 씨는 중증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10대 동생 두 명을 돌보고 있다. 배달대행업체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최근 중풍에 걸렸고, 어머니는 조 씨가 어릴 때 아버지와 이혼한 뒤 집을 떠났다. 조 씨는 “가족이 아프면 재난으로 느껴질 정도로 내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다”면서도 “아버지가 있다 보니 스스로 가족 돌봄 청소년인지조차 몰랐다”고 말했다.
10여 년 전부터 심장질환을 앓는 어머니를 혼자 돌보는 유하은(가명·18) 양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유 양은 어머니가 심정지로 쓰러져 장기 입원하자 학교를 그만두고 간병을 자처했다. 최근에야 자신이 가족 돌봄 청소년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유 양은 “주위에선 효녀라고 하는데 엄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며 “주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엄마를 그렇게 원망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양은 간병 스트레스로 자해를 한 경험도 있다고 한다.
장영진 보건복지부 청년정책팀장은 “올해부터 인천, 울산, 전북, 충북에서 가족 돌봄 및 고립은둔 청년 전담 원스톱 지원체계 시범사업을 실시한다”며 “가족 돌봄 청소년이 스스로 돌봄을 받아야 한다고 인식하고 마땅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민관이 힘을 합칠 것”이라고 말했다.
● 월드비전, 인식 증진 캠페인 실시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월드비전은 이달 말까지 가족 돌봄 청소년 인식 증진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조명환 월드비전 회장은 “가족 돌봄 청소년들이 스스로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주체로 인식하고 실제 사회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며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조기 발굴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말했다.
월드비전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이번 캠페인에 참여할 수 있다. 홈페이지에선 가족 돌봄 청소년들의 사례를 살펴보고 직접 응원 메시지를 남길 수 있다. 월드비전은 또 카카오톡 채널을 개설해 가족 돌봄 청소년들이 외부에 직접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 캠페인 참여자 등이 익명 상담 등을 해준다.
월드비전은 전국 GS25 편의점 1만8500여 곳에 인식 증진 포스터도 부착했다. 포스터에서는 가족 돌봄 행위를 7가지 그림으로 보여주며 더 많은 이들이 지원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배우 공명은 월드비전의 홍보대사로 위촉돼 가족 돌봄 청소년을 응원하는 활동에 참여한다.
박경민 기자 me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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