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애도의 면역학

경기일보 2024. 5. 2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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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찬 인하대 사회복지학 초빙교수·전 서울시자살예방센터장

‘정신면역학’은 인간의 뇌와 면역체계 사이에 상호관계가 있다고 전제한다. 실제로 말초면역계는 뇌의 순환물질로부터 영향을 받고 뇌는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면역활성물질에 반응한다.

5월부터 자살유가족을 만나 집단상담을 시작했다. 매해 진행해온 상담이지만 자살유가족 앞에 서는 일에는 항상 자신이 없다. 초심자처럼 잔뜩 긴장하고 두려움 마음을 안고 참석한다. 자살유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자살 이후 이전과는 다른 낯선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세계에 존재하지만 전혀 다른 공기, 다른 중력,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다. 늘 무언가를 찾고 있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 허망하다. 그래도 무언가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에 끝내 찾을 수 없고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을 또다시 찾는다. 자살유가족은 원래 자신이 가졌던 모습을 세상을 향해 이미지화시켜 보여주고 있지만 어쩌면 자신의 모습도 더는 찾을 수 없다. 자살유가족의 상실은 궁극적으로 자기 상실로 이어지는 궤적을 그린다.

자살유가족 앞에서 구원, 승화, 극복, 회복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말들이 뿜어내는 환상을 단념하는 게 위로가 된다. 구원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 상처가 치유될 거라는 기대에서 벗어나는 것이 때로는 도움이 된다. 자살에 대해서도 무조건 막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살에 저항하며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이 바로 자살사망자 고인이었음을 알린다. 유가족들이 내가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고, 사전에 대처했어야 했다고 자책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환기한다.

상담이 중반으로 접어들면 상담자는 자신이 어느새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영매(靈媒)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던 고인의 고유한 삶과 죽음을 해석하는 동시에 가족들이 그동안 어디서도 표출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안전하게 쏟아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상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 수밖에 없음을 알린다. 다만 고통스러운 감정이나 생각이 엄습할 때 거기에만 매몰되지 않고 어떻게든 표현할 수 있는 방향을 함께 모색한다. 이 과정에서 애도(哀悼)가 시작된다.

애도는 앞서 언급한 정신면역학적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면역기능이다. 애도하면서 면역기능이 다시 제 역할을 하고 정신적으로도 버틸 수 있게 만든다. 자신을 지키면서 슬퍼할 수 있는 진지(陣地)를 구축한다. 애도는 새로운 삶의 자리로 이동할 수 있는 운송수단 같은 역할을 한다. 이는 생명이 있는 한, 어떤 형태로든 고통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에 관해 묻고, 나름의 답을 찾아 나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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