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가정 3일 만에 지원한다”

박선하 TheButter 기자 2024. 5. 2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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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복지재단 ‘SOS위고’

“하루에 한 끼 먹거나 며칠씩 굶기도 했어요. 집에 가스, 전기도 안 들어왔어요. 잠들면 바퀴벌레가 귀에 들어갈 것 같아 눈도 못 감았어요.”

올해 대학교에 입학한 엘레나(가명·18)양은 작년 8월까지의 생활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아프리카 기니비사우 출신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엘레나와 두 동생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그마저도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지난 2021년 아버지가 “대전으로 일하러 간다”며 떠난 후 미성년자인 세 자매는 텅 빈 집에 혼자 남겨졌다. 아버지가 떠난 후 알게 된 현실은 더욱 참담했다. 월세는 5년 넘게 밀려있었다. 아버지가 체납한 자동차세와 벌금도 900만원이나 됐다.

세 자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엘레나의 학교에서 매월 30만원씩 나오는 장학금으로 근근이 버텼다. 설상가상으로 집주인은 보증금이 바닥났다며 ‘퇴거’를 요구했다. 길바닥에 그대로 나앉을 위기였다. 그때 다문화 지역아동센터 ‘포천 하랑센터’를 운영하는 박승호 센터장이 세 자매를 발견했다. 박 센터장은 경기 포천의 센터 근처에 집을 구해주고 아이들의 전학을 도왔다. 자매들의 사정을 확인한 뒤, 자매가 재단 관계자와 만난지 3일만에 일어난 변화다.

주거비로 300만원, 생계비로 240만원이 들었다. 이렇게 큰돈이 빠르게 마련될 수 있었던 건 이랜드복지재단 덕분이다. 박 센터장은 재단이 운영하는 ‘SOS위고(이하 위고)’ 사업을 떠올렸고 도움을 요청한 즉시 긴급 지원이 이뤄질 수 있었다.

위기가정 긴급지원 프로그램 'SOS위고'를 통한 지원을 받고 난 뒤 밝아진 엘레나(가명)와 동생들의 모습. 사진 위 글귀는 엘레나가 재단에 보낸 감사편지에서 따왔다. /이랜드복지재단 제공

긴급 지원에 ‘3일 심사’… 국내 최단기간

이랜드복지재단은 1996년부터 ‘인큐베이팅’이라는 이름으로 위기가정 지원사업을 시작했고, 2022년부터 ‘SOS위고’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사업을 이어가고있다. 갑작스러운 위기로 빠르게 사회적 고립과 빈곤의 수렁으로 빠질 가능성이 높은 가정을 찾아내 일상으로 끌어올리는 맞춤형 지원을 발 빠르게 제공한다. 지난해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공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비수급 빈곤층은 66만명으로 집계됐다.

복지 사각지대 발굴 노력에도 불구하고 엘레나와 같은 사례가 반복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사회적으로 고립된 빈곤층이 복잡하고 다양한 복지 제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또 지원 기간이 별도로 정해져 있거나 신청에서 지급까지 최대 3개월 이상 소요되는 점도 있다. 당장 끼니 해결도 어려운 사람들이 정해진 기간 안에 서류를 제출하고 수개월의 심사를 기다리기란 쉽지 않다.

위고의 가장 큰 특징은 현장 심사 후 3일 이내에 지원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이다. 생필품이 시급한 가정에는 24시간 내 지원하기도 한다. 정영일 이랜드복지재단 대표는 “위기를 버틸 힘이 부족한 빈곤층 지원엔 ‘골든타임’ 사수가 필수적”이라며 “국내 최단기간인 ‘3일 심사’를 도입해 위기가정의 일상 복귀를 실질적으로 이뤄내고 있다”고 했다.

지원 범위는 임대보증금, 월세, 생필품 등 의식주부터 자녀교육비, 의복비, 주거환경개선비, 간병비 등 삶의 질 향상과 관련된 분야까지 다양하다. 구체적으로 주거비와 생계비로는 최대 300만원, 의료비는 최대 500만원을 지원한다. 한 가정당 최대 지원금은 700만원이다. 정영일 대표는 “위기가정의 일상 회복을 위한 다양한 지원을 열어놓고 있다”며 “‘한 가정의 무너짐을 막는 긴급 지원’이라는 목표에 맞게 최대한 유연하게 운영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폭넓은 지역 네트워크도 위고의 장점 중 하나다. 전국의 사회복지단체 관계자와 행정복지센터 담당자들은 위고 사업에 언제든 신청서를 넣을 수 있다. 긴급한 도움이 필요하지만 공적 복지체계로 지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이들의 사연과 필요한 내용을 재단에 제출하는 식이다. 이정민 SOS위고 현장매니저는 “위기가정 당사자들은 스스로의 상황과 필요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면서 “지역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회복지 종사자나 공무원 등이 나서서 이들을 발굴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네트워크의 또 한 축은 ‘위고 봉사단’이 맡고 있다. 엘레나 자매를 긴급 지원할 수 있던 것도 봉사단 소속의 박승호 포천 하랑센터장 덕분이다. 위고 봉사단은 공익 활동에 꾸준히 참여하는 종교인, 비영리단체활동가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이 직접 위기가정을 발굴하고, 사후 모니터링까지 진행하는 구조다. 엘레나 자매는 센터 인근에 거주하며 박 센터장과 일상을 공유하며 지내고 있다.

촘촘한 사회안전망 구축… 지원 이후 자립률 90%

지원 대상자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보호자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미성년자를 비롯해 사회초년생, 중장년층도 있다. 재단 관계자는 “위기가정은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라며 “촘촘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라고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60대 남성 박명환(가명)씨다. 자영업자로 아내, 자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던 그는 어느 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며 심각한 지적장애를 얻었다. 아내는 이혼을 통보했고, 지금은 가족의 생사조차 알 수 없다. 오갈 데 없어진 박씨는 지방의 한 농장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대신 농사일을 하며 지냈다. 숙소는 견사 옆 창고였다. 화장실은 없었다. 10년 이상 일했지만,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농장주는 박씨에게 고된 농사 일을 강요했고, 보다 못한 지자체 관계자가 나서자 농장주는 박씨를 쫓아냈다.

재단은 위고를 통해 박씨에 대한 주거 지원을 결정했다. 십수년 만에 제대로 된 집에서 잠잘 수 있었다. 그는 “매일 씻을 수 있어 너무 좋다”고 했다. 지금은 장애인복지관을 다니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자립의 희망을 얻은 건 정미나(가명)씨도 마찬가지다. 6년 전 어머니 사망 이후 삶의 의미와 경제력을 모두 잃었다. 창문조차 닫히지 않는 고장난 차량 안에서 생활하던 그는 위고 사업에 선정된 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정씨는 재단에 보낸 자필 편지에 “발 쭉 뻗고 잠자고, 씻고, 빨래하고, 안전한 지붕이 있는 실내에서 살 수 있게 됐다”며 “경제적, 정신적 문제 모두를 잘 풀어나가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편지지 위 민아씨의 글씨체는 정갈하고 단정했다.

위고 사업 이후 자립에 성공한 사례는 전체의 90%에 이른다. 재단은 위고 사업을 통해 발굴한 다양한 복지 사각지대를 메울 추가 사업도 진행 중이다. 임직원이 직접 주거환경 개선이나 멘토링, 교육 등 봉사활동에 나서거나, 관련 공익 단체들과의 협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재단은 앞으로도 위고를 통한 복지 사각지대 지원 활동을 지속할 계획이다. 정영일 대표는 “복지 정책이 변하는 시간을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며 “이들을 위기에서 일상으로 끌어올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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