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뷰] “계급 주입말라” 김민기의 당부

정우상 논설위원 2024. 5. 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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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 통한 교육 기회 사다리
하지만 이념·계급 교육은 반대
포용 허락 않는 극단의 터널
저항과 통합이 공존하는 음악
김민기./'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갈무리

1973년 김민기는 지금의 목동인 신정동에서 야학을 했다. 야학은 돈이 없어 학교에 다닐 수 없거나, 낮에는 공장에 다녀서 밤에 공부해야 하는 청소년을 위한 배움터였다. 국가 대신 대학생들이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최근 방영된 김민기 다큐멘터리에선 이제는 60대 후반이 된 그때 ‘신정 야학’ 교사들이 모여 김민기를 기억했다. 김준규 전 검찰총장, 이인용 전 삼성전자 사장, 김한 전 JB금융지주 회장이다.

당시 학생용 영어 교재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용을 살펴보니 ‘나는 노동자, 너는 자본가(I’m a laborer, You are a owner)’라는 문구가 있었다. 빈민층 학생들에게 이념 교육을 통해 계급의식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김민기 생각은 달랐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슨 사상 주입을 하려고, 정치적인 교육을 하려고 이런 야학을 하는 게 아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해야 한다.” ‘저항 가수’ 김민기는 왜 그랬을까.

김민기를 두고 “과격한 운동권 같지만 사실은 순수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경기고 선배였던 손학규도, 음악 친구 송창식도, 신정야학 후배들도 그렇게 김민기를 기억했다. 순수라는 말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대략 정치적이지 않다는 뜻이라면 김민기가 순수했다는 평가는 절반만 맞다. 서울대 미대를 다니던 김민기는 빈민촌 야학 이후에는 인천 부평의 공장으로 갔다. 경기도 연천에서 농사를 지은 적도 있다. 거창한 계급투쟁 이런 건 아니었지만 변혁의 주체가 도시 빈민, 노동자, 농민이라는 분명한 의식과 계획을 갖고 있었다.

유신 시대와 80년대 시위 현장에서 애국가처럼 불렸던 ‘아침 이슬’을 만든 김민기. 87년 민주화 이전까지 그의 모든 노래가 금지곡이 되면서 김민기는 실제와 달리 투사로 인식됐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탄탄대로를 예상했던 김민기는 예상 못 한 벽을 만났다. 민주주의 그다음, 사회주의와 반미(反美)를 추구했던 운동권은 김민기를 계급의식이 희박한 관념적 지식인으로 비판했다. 왜 노동 해방이나 조국 통일 같은 메시지를 노래에 분명히 반영하지 않느냐는 불만이었다. 혁명의 시대가 되자 김민기는 한발 뒤로 물러났다. 학전이라는 소극장을 기반으로 뮤지컬과 연극을 무대에 올렸고, 마지막까지 어린이 연극과 노래에 헌신했다. 사람들은 그를 높은 봉우리라고 했는데 자신은 그저 고갯마루에 불과하다고 했다.

학전 폐쇄를 계기로 그의 노래와 삶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김민기가 민주화 이후 정치와 거리를 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는 김지하와 이문열, 황석영 같은 예술가들이 정치와 불화를 겪으며 짊어졌던 불운과 불편함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이와 달리 김민기의 ‘아침 이슬’은 시위하는 대학생도, 비정규직 노동자도, 대통령도, 재벌 회장도 함께 부르는 노래다. 저들에 푸르른으로 시작하는 ‘상록수’는 누군가에게 저항의 노래지만 누군가에는 통합과 희망의 노래다.

지금 우리는 회색과 포용을 용납 않는 극단의 시대 속 터널을 지나고 있다. 현금 25만원을 주자 말자, 기득권 보수입네 종북 좌파입네, 분열의 언어만 박수를 받는다. 계급의식을 주입하지 말라고 한 것도 김민기고, 빈민 청소년에게 야학으로 계층 이동 사다리를 놓아주려 한 이도 김민기다. 야학 후배였던 이인용은 이렇게 기억했다. “민기 형은 저항의 상징처럼 돼 있지만, 아마 조금 더 좋은 세상,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을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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