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어’의 경계 확장…끝 모를 지평선 위, 사방의 말이 내려앉았다[한성우의 말과 글의 풍경]

기자 2024. 5. 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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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제만경과 완산
징게맹겡의 너른 들, 김제와 만경을 합쳐 이 지역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말의 스펙트럼이 모두 설명되듯이 이 또한 명확한 음운규칙으로 설명된다. 사진은 김제 벽골제 부근 상공에서 드론 파노라마 촬영으로 담은 들녘. 권혁일 기자 milpislove@kyunghyang.com
충청과 전라가 닿은 전북 북부
금강 건너 중부방언과 다르고
또 전남의 진한 사투리도 아냐
‘ㅚ’ ‘ㅟ’ 등 발음 정확한 반면에
‘ㅢ’ ‘ㅖ’는 ‘ㅡ’ ‘ㅔ’가 되는 특징
곰소의 송화 소금 같은 묘한 맛
‘가맥’이 된 ‘가게 맥주’ 변천도
‘모주’ 속 한바탕 끓여진 마음도
징하고 짠하다, 이 거시기한 말

표준어는 지독한 구심력이 있다.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서울말 부심’은 대단한데 이들은 성저십리(城底十里), 즉 도성 밖 십 리까지는 서울말을 쓰는 것으로 쳐준다. 서울 남쪽의 용인을 지나 남쪽으로 갈수록 충청도 말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데 자신들은 서울말을 쓴다고 믿는다. 아산만을 건너 내포에 들어서면 속 터지는 진짜배기 충청도 말이 펼쳐지지만 조금은 겸연쩍어하면서도 우리는 표준말을 쓰는데 ‘저 남쪽’은 전라도 말을 쓴다고 한다. 이들의 말대로 충청도 남쪽의 말은 언뜻 들으면 전라도 말인 듯한데 이들은 자신들이 쓰는 말까지는 표준말이고 금강을 건너면 전라도 말이라고 한다.

금강을 건너면 표준어의 구심력이 약해져 전라북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은 그래도 서울말과 가까운데 저 아래 사람들은 심한 사투리를 쓴다고 한다. 저 아래의 전라남도 사람들은 자신들은 진짜배기 남도 말인데 저 위쪽 사람들은 충청도 말 같다고 한다. 바로 이 지역, 전라북도 북부의 말은 그렇다. 그 위의 말은 중부방언에 속하니 서울말 혹은 표준말과 같다고 우길 수 있으나 이 지역은 차마 그러지 못한다. 그렇다고 진한 사투리도 아니어서 얼치기 전라도 말이라 취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땅의 모든 말이 그렇듯 이 지역의 말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징게맹겡 너른 들

징게맹경 어딘가 최 생원네 손자란 놈/ 제아무리 잘났어도/ 똥구멍 새까만 놈일 거라 생각했지요. 심호택, ‘똥구멍 새까만 놈’

학생들과의 답사 여정이 김제 만경의 넓은 들판에 이르렀을 때 심호택의 시가 생각이 나 상품을 걸고 퀴즈를 낸다. ‘김제 만경’이 ‘징게맹겡’까지 가기 위해서는 오십 리 길을 가야 하는 정도이니 이 과정을 설명하라는. 문학과 어학을 공부하는 학과이니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웅성대며 저마다의 방법으로 문제를 푼다. 출제 의도는 ‘김제 만경’이 ‘징게맹겡’이 되기까지의 음운변화를 설명하라는 것이었는데 이 문제를 시적으로 해석해 또 다른 시를 짓는 학생부터 내비게이션을 켜고 그 경로를 추적하는 학생들까지 각양각색이다.

‘과도교정, 구개음화, 움라우트, 위치동화, 축약’이라는 다섯 가지 규칙을 순서대로 잘 적용해야 답을 맞힐 수 있는데 고맙게도 세 학생이나 정답을 말한다. 핵심은 ‘점심을 먹으려면 지름길로 질러 가’라고 말하면 될 것을 ‘겸심을 먹으려면 기름길로 길러 가’라고 말하는 ‘과도교정’이다. ‘길’을 ‘질’로 말하는 이들은 자신의 사투리가 들킬까 봐 본래 맞는 것도 과하게 고쳐 말하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이다. 표준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자신의 말은 서울말과 다르지 않다고 강변하는 이들이 흔히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제를 비롯해 전주, 익산, 군산, 부안, 정읍 지역의 말은 서울말보다 더 표준어다운 면이 있다. 표준어는 서울말을 바탕으로 했다지만 어차피 가상의 언어이다. 표준어 규정에 따르면 모음이 10개인데 요즘 서울 사람은 ‘에’와 ‘애’를 구별하지 못하고 ‘위’와 ‘외’도 엉터리로 발음한다. 반면에 이 지역 사람들은 ‘게’와 ‘개’를 헷갈리는 일이 없고 ‘외’와 ‘위’의 발음이 정확해 ‘괴도, 괘도, 궤도’를 명확하게 구별해 발음한다. 이 지역 사람들이 ‘귀, 쇠’ 등을 발음할 때 동그란 상태로 유지되는 입 모양을 보면 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지역 사람들의 ‘의’와 ‘예’ 발음이 이상하다. 누군가 “이것은 우리으 에쁜 애기 것이오”라고 말한다면 틀림없이 이 지역 출신이다. 보통 ‘이건’이라고 하는 것을 굳이 ‘이것은’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라도 지역 전체에 나타나지만 ‘의’를 ‘으’로 ‘예’를 ‘에’로 발음하는 것은 전라북도 북부 지역에서만 나타난다. 경상도 지역과 달라서 정확히 발음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이 땅의 말이다. 징게맹게 너른 들과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이 이들의 표준어일 뿐이다.

곰소의 염전. 5월에는 송홧가루가 내려앉아 노란 송화 소금이 만들어진다. 모든 지역의 말은 본래의 짠맛에 다른 맛이 더해져 달콤해진다. 해양수산부 제공

곰소의 송화 소금, 소금과 말의 참맛

윤사월의, 아니 오월의 들판에 잇닿은 나지막한 산을 지나다 보면 박목월이 묘사한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를 볼 수 있다. 소나무가 울창한 숲에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유황 연기처럼 날리는 송홧가루가 보인다. 봄비가 그친 후 길가에 고인 물이 말라갈 때 노랗게 남는 앙금이 바로 송홧가루다. 암꽃과 수꽃이 한 몸에 있되 그 거리는 천 리 길과 같으니 바람의 도움을 받아 짝을 짓고 솔방울에 씨를 채우기 위한 과정이다.

일 년에 딱 한 번 열흘 동안 이 송홧가루는 은혜를 베푼다. 부안의 곰소 염전에서 이 시기에 생산되는 송화 소금이 그 은혜의 결과이다. 소금은 눈처럼 희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송화 소금은 불순물이 들어간 불량소금이다. 그러나 노오란 송홧가루를 본 이, 이 가루를 꿀로 빚어 틀에 찍어낸 송화다식의 알싸한 맛을 본 이는 그리 말하지 않는다. 송홧가루가 들어간 이 소금은 영양도 특별해서 최고급 천일염 대우를 받는다. 송홧가루는 이물질 혹은 불순물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소금은 짜야 한다고 믿으나 소금의 맛과 가치는 다른 것이 결정한다. 가장 기본적인 맛이 짠맛이고 이 짠맛을 내는 성분은 우리 몸에 필수적이니 소금은 짜야 한다. 그러나 소금의 짠맛은 기본, 소금의 가치는 짠맛이 아닌 쓴맛과 단맛 때문에 높아진다. 오로지 짠맛만 원한다면 정제염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바닷물을 햇빛과 바람에 졸이는 과정에 끼어드는 각종 유기물과 미네랄이 함유된 천일염을 찾는다. 또한 무기질이 포함돼 분홍빛을 띠는 히말라야 소금이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소금과 마찬가지로 말은 순수해야 한다고 믿으나 그런 순수한 말은 있을 수도 없고 반드시 그것의 가치가 높은 것도 아니다. 순수한 우리말만을 골라내고 나면 몇 안 되는 고유어만 남게 될 것이다. 한자어에 의한 고유어의 소멸, 일본어의 잔재, 영어계 외래어의 난입 등에 치인 우리들의 고유어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그러나 고유어로만 이루어진 언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필요한 것은 수입하고 넘치는 것은 수출하듯이 말도 그렇게 경계를 넘나든다.

이런 점에서 이 땅의 모든 말은 스스로가 송화 소금으로서의 가치를 드러낸다. 서울말이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니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그 지역의 말에는 인접한 충청도 말이 송홧가루처럼 내려앉는다. 충청도의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이 말과 금강 너머의 전라도 말이 서로에게 스며든다. 방방곡곡의 땅에는 그 땅에 기대어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키우며 깁고 보태온 말이 쓰이고 있다. 그래서 징게맹겡의 너른 들에서 일하는 농사꾼의 말이나 사대문 안의 서울깍쟁이의 말이 모두 가치가 있다.

‘가맥’의 비밀

“가맥은 한자로는 어떻게 써야 할까?” 전주 답사 일정 중의 자유시간, 학생 몇 명과 전주에만 있는 ‘가맥’에 자리를 잡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보리 맥(麥)’에는 이견이 없는데 ‘집 가(家)’와 ‘길 가(街)’ 사이에서 의견이 둘로 갈린다. 솔로몬의 판결이 필요한 시점인데 천하의 솔로몬일지라도 답을 할 수가 없다. 일단 둘 다 틀렸으니 다른 한자를 찾아야 하는데 의외로 정답은 ‘거짓 가(假)’이다. 물론 이리 하면 ‘가짜 맥줏집’이 되니 이때는 ‘거짓’보다는 ‘임시’라는 뜻으로 풀어야 한다.

가맥을 ‘길거리 맥줏집’인 ‘街麥’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가게 맥주’를 줄인 말이다. 가게에서 맥주를 산 이가 그 자리에서 마시길 원해 자리를 내어주니 안주까지 찾는다. 오징어와 북어를 구워주니 손님이 몰리게 돼 가게 한 귀퉁이에 아예 자리를 마련하다 보니 가게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집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래를 알고 나면 한자를 쓰기가 난감해진다. ‘가게’에 어울릴 만한 한자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가게는 ‘假家’였다. 물건을 쌓아 놓기 위해 시렁이나 선반을 임시로 설치하고 천막을 씌운 것이 ‘임시로 지은 집’인 ‘假家’인 것이다. 이렇게 물건을 쌓아 놓고 파는 상점이 늘어나다 보니 그 상점을 ‘가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가짜 집’ 혹은 ‘임시 집’이란 말과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뭔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니 사람들은 한자와의 관련성을 잊게 되고 말소리도 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가게’로만 남았고 ‘假家’와의 관련성은 잊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말은 한자어인가? 본래 한자와 그 음대로 ‘가가’라고 쓰인다면 한자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니다. 그렇다고 고유어는 더더욱 아니니 이런 말들을 귀화어라고 한다. 본래 태어난 나라가 있지만 여러 이유로 다른 나라 사람이 되기로 하는 것을 귀화라고 하듯이 기원은 한자어이지만 뜻과 소리가 달라져 아예 우리말로 눌러앉은 말이다. 맥주 한 병을 사 들고 진짜 집에 가서 마시면 될 것을 가짜 집에서 눌러앉아 마시다가 전주 특유의 가맥이란, 술집도 가게도 아닌 것을 만들어낸 것과 비슷하다.

최명희문학관의 글귀. 최명희의 표현대로 꽃심을 지닌 땅의 말에서는 징하고 짠한 향기가 나서 거시기해진다. 한성우 제공

모주의 냄새 혹은 향기

답사의 마지막 날은 귀가의 첫날이라 말하지만 학생들은 그렇지 않아 최후의 만찬인 듯 즐긴다. 그런 다음 날의 숙취와 허기를 달래기 위한 전주의 특별식이 있으니 콩나물국밥과 모주가 그것이다. 콩나물국밥이야 어디서든 접할 수 있지만 학생들은 모주의 빛깔과 냄새를 낯설어한다. 흑설탕에서 우러난 짙은 갈색은 그렇다 쳐도 계피와 각종 한약재가 섞인 한약 냄새를 싫어한다. 모주의 참맛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학생에게 묻는다. 모주에서 나는 것은 ‘냄새’인지, ‘향기’인지.

술을 거르고 난 술지게미를 써서 만들었으니, 없던 맛을 더하기 위해 각종 한약재와 한 급 낮은 흑설탕을 넣었으니 향기라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몸에 나쁜 술이기에 약초라도 넣어 아들의 몸을 보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유래가 맞는다면 냄새가 아닌 향기라 해야 할 것이다. 혹은 맛과 예술에 대한 전주사람의 자부심이 엿보인다면 그 역시 향기라 해야 할 것이다. 1번 국도를 따라 혹은 호남선을 타고 남쪽으로 가다보면 화려한 말의 무지개가 보인다. 그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오늘도 모두가 고유의 빛과 멋을 내뿜는다. 징게맹겡의 말과 완산벌의 말도 그렇다. 징하고 짠해 거시기한 이 말에서 짙은 향기가 난다.

■필자 한성우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

한성우 국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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