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황금기에는 끝이 있다[백승찬의 우회도로]

백승찬 기자 2024. 5. 2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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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현지시간) 밤 프랑스 칸국제영화제 주 상영관인 뤼미에르 대극장 레드 카펫에서 <베테랑 2> 제작진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CJ CNM 제공

칸국제영화제는 한국에서 통상 베니스, 베를린과 함께 ‘세계 3대 국제영화제’라고 불리지만 이는 그다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현재 칸영화제의 위상은 나머지 영화제보다 크게 높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영화인들은 가능하면 칸영화제를 먼저 두드린다. 굳이 나누자면 칸이 1강, 베니스와 베를린은 2중이다.

한국영화에 칸의 문턱은 그만큼 높았다. 베를린이 1961년 <마부>에 특별 은곰상, 베니스가 1987년 <씨받이>의 고 강수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수여했지만, 한국영화가 칸의 핵심인 경쟁 부문에 오른 것은 2000년 <춘향뎐>이 처음이었다. <춘향뎐> 상영 후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고 이태원 제작자는 어깨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세계 최고의 영화축제에서 턱시도를 차려입은 관객 2000여명이 일제히 기립박수로 경의를 표하면 어떤 영화인도 감정을 감추기 어려울 것이다.

제77회 칸영화제가 25일까지 열린다. <춘향뎐> 이후 2022년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까지 한국영화 19편이 칸 경쟁 부문에 선정됐다. 올해 경쟁 부문에는 한국영화가 없다. 비경쟁인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의 <베테랑 2>, 칸 클래식 부문의 <영화청년, 동호>, 학생 단편영화를 상영하는 라 시네프 부문의 <메아리>가 올해 칸의 한국영화다. 지난해에도 경쟁 부문에는 한국영화가 없었지만, <거미집> <우리의 하루> <잠> 등 7편이 그 외 부문에서 고루 상영됐다.

물론 칸에서 상영되지 않았다고 시시한 영화라 할 수는 없다. 제작 기간과 영화제 출품 시기가 맞지 않을 수 있고, 굳이 영화제에 출품하지 않고 곧바로 관객의 선택을 받을 수도 있다. <기생충>으로 한국영화 최초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은 내년 초 개봉이 예정됐기에 칸과 무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수의 비엔날레, 문학상, 영화제는 늘 새로운 트렌드를 발굴하려 한다. 칸 역시 한때 중국영화, 다음엔 이란영화, 그다음엔 루마니아영화들을 잇달아 소개했다. 올해 칸의 선택을 받지 못한 영화가 훗날 ‘칸의 실수’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영화는 칸의 선택과 상관없이 안녕한가. 경쟁 부문이 아니더라도 유망한 신진 감독의 작품을 상영하는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칸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비평가주간이나 감독주간에 한국영화가 없다는 점은 한국영화에 새로운 재능이 많지 않다는 신호다. 봉준호 역시 <괴물>(2006)로 감독주간, <마더>(2009)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된 뒤 <옥자>(2017)로 처음 경쟁 부문에 올랐다. 칸 경쟁 부문 진출 경력이 있는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홍상수의 신작이 없는 해에는 당분간 경쟁 부문에서 한국영화를 찾기 어려울 수 있다. 범위를 넓혀봐도 <추격자> <황해> <곡성> 등 3편을 모두 비경쟁 부문과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선보인 나홍진의 차기작 정도가 경쟁 부문 진출 가능성이 있다.

한국영화는 상업성과 창의성이 사이좋게 녹아든 보기 드문 생태계를 형성해왔다. 연간 1인당 관람 횟수가 세계 최고 수준인 관객의 열렬한 사랑과 창의적인 영화인들의 노력이 만든 결과다. 애니메이션 극장판이나 드라마의 영화 버전이 박스오피스를 장악한 일본, 표현의 자유에 한계가 있는 중국 영화인들은 한국영화 생태계를 부러워했다. K팝의 인기 이전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린 것은 영화였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성공 비결은 미국이나 프랑스 등 전통적 영화강국의 연구 사례였다. 한국산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드라마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오징어 게임>은 영화감독 황동혁, 영화제작자 김지연의 첫 OTT 작품이었다.

미래에도 그럴지는 불분명하다. 근 몇년 사이 ‘천만 영화’ 감독들의 신작은 잇달아 흥행에 실패했다. 이들을 넘어설 비전을 갖춘 신진 상업영화 감독도 보기 드물다. 독립영화 진영엔 활기가 없다. 재주 많은 중진 감독들은 OTT 연출로 돌아섰다. 시네필의 해방구였던 각 지역 영화제들은 예산 삭감으로 전전긍긍한다. 영화진흥위원회는 돈이 없어서 매년 칸영화제에서 열던 ‘한국영화의 밤’ 행사를 올해 열지 못했다. 살길 찾기 바쁜 극장은 ‘독과점’이라는 비난에 아랑곳없이 <범죄도시 4>에 10개 스크린 중 8개를 배정했다. <범죄도시 4>가 개봉한 지난달 4월24일 이후 주요 한국 상업영화는 아예 개봉 일정을 잡지 않았다. 지금 한국영화계에는 비슷한 형식과 재미를 반복하는 <범죄도시 4>에 맞설 창의성과 패기 대신 개봉을 피하는 전략만 남았다.

모든 황금기에는 끝이 있다. 2000년대 이후 이어진 한국영화의 진정한 황금기는 이미 끝났을지 모른다. 황금기 이후에는 암흑기가 있다. 암흑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다음번 황금기의 도래 여부가 달려있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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