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안에서 찍은 영화…“기억을 채워주고 싶다”

김은형 기자 2024. 5. 2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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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소재 영화 ‘목화솜 피는 날’
신경수 감독∙박원상 배우 인터뷰
영화 ‘목화솜 피는 날’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22일 개봉한 영화 ‘목화솜 피는 날’에서 세월호 참사로 딸 경은을 잃은 아빠와 엄마는 지금까지 세월호 관련 작품들에서 보아왔던 인물들과 조금 다르다. 아빠 병호(박원상)는 진실규명을 위해 헌신했지만 어느새 다른 유가족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문제 인물이 됐다. 엄마 수현(우미화)은 다른 유족들과 만나는 걸 피하고 경은의 유품도 서둘러 정리하려고 한다. 헌신하고, 눈물짓고, 조용히 인내하는, 구경꾼들이 보고 싶어하는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다. ‘목화솜 피는 날’은 지금까지 그려졌던 세월호 이야기에 새로운 물꼬를 튼다. 신경수 감독은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면서 슬픔이 영화 안에 갇혀 버리는 작품이 되지 않길 원했다”고 했다. 21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신경수 감독과 병호를 연기한 배우 박원상을 만났다.



세월호 10주기 극영화 ‘목화솜 피는 날’ 신경수 감독(오른쪽)과 주연을 맡은 박원상 배우(왼쪽)가 21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연기를 하다가 캐릭터 안으로 훅 들어가는 순간이 있는데 컨테이너 회의실에서 다른 유족들과 큰 소리로 다투는 장면이 그랬다. 분란을 일으키는 병호에게 ‘이제 좀 쉬시라’는 상대방의 대사를 정말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다. 쉴 수없는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 이보다 잔인한 말이 있을까?” 박원상은 영화를 찍으며 그와 동갑이며 그에게 선체를 안내해준 동수 아버지를 많이 떠올렸다고 했다.

영화 ‘목화솜 피는 날’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드라마 피디로 활동하며 ‘뿌리깊은 나무’ ‘육룡이 나르샤’ 등 작품성과 흥행에서 두루 좋은 성과를 거둬온 신경수 감독에게 ‘목화솜 피는 날’은 첫 영화 연출작이다. 세월호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김탁환 작가의 ‘거짓말이다’의 드라마화를 준비하던 중 2022년 가을 이 영화의 연출을 제안받았다. “세월호 선체에서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게 작품으로서뿐 아니라 기록으로서도 큰 의미가 있겠다 싶어” 승낙했는데 “지난해 봄 안전문제로 곧 선체 내부가 폐쇄될 거 같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촬영을 진행했다. 놀랍게도 90분 영화가 열흘 동안 단 8회의 촬영으로 완성됐다. 방송가에서도 유명한 신 감독의 속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 감독과 이번에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박원상 배우는 “배우 공승연씨가 촬영 전에 신 감독은 현장에서 누수 없이 굉장한 템포를 가진 감독이라고, 고도의 집중력을 가져야 그 템포를 따라갈 수 있다고 귀띔을 해줬다”면서 “나중에 우리가 8회만 찍었다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 밀도가 대단해서 10회 이상 찍은 걸로 착각했다”고 했다.

감독 개런티도 받지 않고 뛰어들 만큼 빠듯한 예산이었지만 “엑스트라 반장, ‘모범택시’ 작가의 금일봉 쾌척” 등 동료들의 십시일반으로 열흘 동안 두 번이나 회식도 하면서 찰떡같은 궁합으로 배우들과 모든 스태프들이 함께 달린 시간이었다. “신경수 감독이라고 해서 고민 없이 출연을 결정하고 첫날 대본 리딩을 가니 친한 동료들이 다 모여있어 앙상블을 위해 노력할 시간이 필요 없었다”는 박원상의 말처럼 ‘목화솜 피는 날’은 최덕문, 조희봉, 정규수 등 조연까지 빈틈없는 연기호흡을 담았다.

영화 ‘목화솜 피는 날’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목화솜 피는 날’이 공개하는 세월호 선체는 그동안 다큐멘터리나 뉴스가 보여줬던 모습과 다르다. 참혹함보다 아이들이 이곳에서 수다를 떨고 여기서 잠들었겠다는 이야기적 상상을 불어넣는다. 신 감독은 “목포 신항 철조망 너머로 선체를 보면 너무 가엽고 쓸쓸해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데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엄청 거대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면서 “이게 고래 뱃속이구나, 그래서 병호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촬영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밤 촬영을 앞두고 스텝들이 두려움으로 동요하기도 했다. 이때도 신감독의 전투적 속도가 힘을 발휘했다. “지인들이 세월호 촬영 어땠냐고 많이들 묻는데 정말 생각할 겨를 없이 찍었다. 생각했으면 바라보는 입장이 됐을 텐데 그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온전히 병호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박원상).

세월호 10주기 극영화 ‘목화솜 피는 날’ 신경수 감독(오른쪽)과 주연을 맡은 박원상 배우(왼쪽)가 21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신 감독은 “많은 유족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내고 있고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서 “우리 영화가 마중물이 되어 세월호에 좀 더 편하게 접근하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다” 고 했다. 배우 박원상은 “얼마 전 한 중학생이 다가와서 사인을 해달라며 한참 전에 개봉했던 (주인공으로 출연한)‘남영동 1985’를 봤다고 하더라. 배우는 우리가 바쁜 일상에서 잊고 사는 것들을 대신 기억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 영화도 흐려지거나 의도하지 않게 잊히는 누군가의 기억을 채워주리라 생각한다”며 “꼭 극장에서 만나시라”고 간절한 당부의 인사를 건넸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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