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함께 산 ‘피보다 진한’ 친구인데… “가족 아니라 수술동의도 못해줘”[‘가족’이 달라진다]

김린아 기자 2024. 5. 22.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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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 달라진다 - (上) ‘老-老가족’ 하정옥·박희순 할머니
사별·미혼 70대 두 할머니
사실상 ‘실질적 가족’ 인데
법적 보호자로는 인정안돼
뇌출혈 응급수술 입원·치료
멀리 사는 조카 와서야 진행
“현행법 가족개념 현실과 괴리”
그래픽=권호영기자

20년 전 남편과 사별한 하정옥(70) 씨에게 ‘가족’은 20년째 같이 살고 있는 친구 박희순(여·70) 씨다. 경북 경주시 내남면 한적한 곳에 작은 펜션을 운영하고 있는 두 사람은 주거도 생계도 돌봄도 공유하고 있다. 두 사람에게는 각각 아들과 딸, 조카가 있지만 왕래가 잦지 않다. 법적인 가족이 존재해도 ‘실질적 가족’은 따로 있는 것이다.

‘노노(老老) 가구’의 최대 걱정은 단연 건강. 하지만 두 사람은 둘 중 하나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거나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할 순간이 와도 상대에게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가혹한 현실’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지난 2012년 하 씨가 복막염으로 심한 고통을 호소했을 때, 박 씨는 하 씨의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하 씨의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지 못했다. 22일 의료법에 따르면 의사는 생명 또는 중대한 위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수술 등을 할 때 환자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받게 돼 있다. 또한 환자가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경우 ‘법정대리인’에게 설명하게 돼 있다. 법정대리인은 통상 민법이 규정하는 ‘부양 의무자’인 부모, 직계 존·비속, 배우자, 생계를 같이하는 친족 등으로 해석된다. 박 씨처럼 생계와 돌봄을 공유하고 있는 동거인은 아무리 오래 함께 살았더라도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

당시 박 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부산에 사는 하 씨의 아들과 딸이 도착하기 전까지 8시간 동안 아픈 친구의 손을 잡고 “조금만 기다려보자”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수술도 8시간 이상 늦어졌다. 박 씨는 다급한 마음에 병원 측에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였다

박 씨는 “멀리 사는 자식보다 20년을 함께 산 친구가 법적 보호자가 될 수는 없는 거냐”며 “우리처럼 사별, 미혼 등으로 함께 사는 사람이 많을 텐데 친족만 법적 보호자로 보니 불편함을 넘어 불합리함까지 느꼈다”고 토로했다.

2년 전인 2010년에는 반대로 박 씨가 뇌출혈이 발생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었다. 수술은 응급 상황인 만큼 보호자 동의 절차를 건너뛰고 진행됐지만, 입원, 치료 등 모든 절차는 대구에 사는 박 씨의 조카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 씨 또한 박 씨를 가족으로 여겨 보살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절망감을 느꼈다고 한다.

2022년 국회에는 환자가 사전에 지정한 사람이 법정대리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의료법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지만, 진전은 없었다.

법적 보호자가 없는 설움은 친족과 왕래가 끊긴 한부모 가정도 마찬가지다. 미혼모 현모(36) 씨는 가족과 연을 끊으면서 혈혈단신으로 초등학생 아들을 키우고 있다. 지난 2018년 현 씨는 부정맥으로 심장박동기 이식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법적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로 수차례 수술을 미뤄야 했다. 전신마취용 약물을 사용하는 각종 검사와 시술을 받을 때도 병원은 보호자의 동의를 요구했다. 현 씨는 답답한 마음에 지자체 복지과 담당 직원에게 “일시적이라도 보호자가 돼 달라”고도 요청해봤지만, “공무원은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현 씨는 그럴 때마다 지인에게 ‘예비 남편’ 행세를 해달라 부탁하고 동의서를 작성하게 했다. 병원에는 사정을 호소했다.

현 씨는 아들이 학교폭력 피해를 당해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가 열렸을 때도 혼자인 사정을 호소해야 했다. 교육청에서 ‘보호자 2명 입회’를 요구해 급하게 사회복지사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현 씨는 “피붙이나 배우자가 아니더라도 나와 친밀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지인 등을 보호자로 등록할 수 있으면 아이에게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진석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법이 규정한 ‘정상 가족’에 속하지 않은 가족들은 늘고 있는데 혈연·혼인 중심의 현행법은 현실과 분명 괴리가 있다”며 “새롭게 탄생한 가족들을 규정할 수 있는 법이 필요하고, 이후 이에 기반해 여러 가지 제도들을 정비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린아·노지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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