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발질 정부’와 K-반도체 사면초가[문희수의 시론]

2024. 5. 22. 11:4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문희수 논설위원
동지도 적도 없는 AI 新경제
라인 사태는 日 AI 만회 전략
TSMC는 韓 주도 HBM 넘봐
美·日·中에 밀리는 韓 경쟁력
반도체, 보조금도 전력도 부족
정책 혼선과 공직자 이반 조짐

인공지능(AI) 시대의 신경제 질서가 글로벌 경제를 혼돈으로 몰아간다. 하루가 지나면 신기술이 발표되는 무한 패권 전쟁이다. 빅테크와 반도체 업체들은 협업과 동시에 경쟁하며 새로운 생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판짜기에 여념이 없다. 기존 영역의 파괴를 넘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공격·수비가 교차하는 대격변기다.

한국엔 우려할 변화가 잇따른다. 네이버의 지분 매각을 압박한 라인야후 사태는 대표적이다. 인터넷에 이어 AI도 뒤진 일본의 필사적인 만회 전략의 산물이다. 소프트뱅크의 AI 패권 야심이 뒤를 받치고 있다. 손정의 회장은 중동 자금까지 모아 무려 88조 원을 투자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일본 정부는 미래를 지향하는 한일관계에 해를 끼치는 것은 피하려 하지만, 저변에는 AI 패권 회복이 더 우선이라는 인식도 보인다.

빅테크들과의 협업·경쟁은 더 험난하다. 시스템 반도체 1위인 대만 TSMC는, AI 반도체의 핵심으로 한국이 주도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까지 넘본다. SK하이닉스가 생산한 것을 TSMC가 조립해, 엔비디아에 납품하는 게 지금의 3자 연합 구도인데, 현재의 5세대(HBM3E) 다음 6세대(HBM4)부터는 직접 생산도 하려는 것이다. 삼성전자를 압박하는 전략이다. 또, 구글은 10년에 걸친 삼성과의 반(反)애플 동맹을 접고 삼성에 맞서 자신의 AI폰 판매를 위해 TSMC와 손잡았다. 그렇지만 삼성은 AI폰의 두뇌(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전쟁에선 구글과 동맹 관계다. 삼성은 또 엔비디아와 HBM에선 협업을 추진하지만, AI 가속기에선 경쟁자다. 비즈니스에선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말이 실감 난다.

이 와중에 한국의 경쟁력은 경쟁국에 밀리고 있다.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에 따르면 25개 첨단산업에서 미국과의 기술 격차는 2017년 1.5년에서 2021년 0.8년까지 줄었다가, 2023년엔 0.9년으로 커졌다. 일본과의 격차도 2021년 0.4년에서 지난해 0.5년으로 확대됐다. 중국과의 기술 격차는 여전히 0.3년 앞서 있다고 하지만, 조선은 역전당했다. 2차전지·차세대 반도체·나노·지능형 로봇 등에서도 경쟁국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반도체의 경우 보조금 전쟁이 치열하지만, 한국으로선 힘겨운 경쟁이다. 반도체는 공장 하나 짓는 데 수조∼수십조 원이 든다. 1년 예산이 656조 원인 형편에서 미국(약 75조 원)·중국(100조 원)처럼 재정을 투입하는 것은 무리다. 윤석열 정부가 삼성 등 제조업체엔 세제를 지원하고, 소·부·장 등 생태계 활성화와 연구·개발에는 민관 합동으로 10조 원+알파를 투입하기로 방향을 잡은 것은, 물론 턱도 없이 부족하지만, 이게 우리의 현주소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어이가 없는 것은, 반도체가 쓸 전력조차 부족하다는 점이다. 송전선로 건설이 7년이나 지연된 탓에 경기도로 전력을 보내기로 돼 있는 동해안 석탄발전소 8곳이 가동을 멈춘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화를 불렀지만, 윤 정부 들어 개선된 것도 없다. 선진국들도 AI발(發) 전력 대란 예고에 초비상인데 한국은 남의 일처럼 여긴다. 국회, 지자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경쟁국들은 반도체 패권을 위해 민관이 똘똘 뭉쳐 총력을 쏟는데 한국은 보조금도 전력도 부족하다. 기업 홀로 뭘 갖고 싸울 수 있겠나.

이런 판에 윤 정부는 임기 초도 아닌 때에 뜬금없이 ‘5·7·5 경제 로드맵’을 운운하고 있다. 남은 임기의 동력이 걱정되는 시기에 14년 전인 2010년 MB 정부가 폐기했던 7·4·7 공약을 흉내 내는 셈이다. 경제 살리기 의지라고 해도 철 지난 캠페인이 감동을 줄 리 없다. 정부 주도가 아닌 시장·민간 중심 경제로 가겠다는 그나마 초심조차 걷어찰 모양이다. 라인 사태 방관, 해외 직구 금지 철회, 저가 중국산에 안방을 내준 태양광 닮은꼴인 해상풍력 방치 같은 정부의 무능이 속출해 불신을 산다. 국민이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의대 증원 등 의료개혁조차 헛발질하지 않을지 불안하다. 위기 불감증이 더 커지는 모양새다. 공직자들의 복지부동과 이반 조짐도 보인다. 청사진이라면 이미 충분하다. 약속을 실천해 하나라도 제대로 뒷받침하는 데 전력투구해야 한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반도체에서 전력에 이어 용수마저 차질을 빚으면 파국뿐이다.

문희수 논설위원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