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먹이는 일’, 농업의 원칙을 세우다 [유럽 농촌에서 본 ‘오래된 미래’ ①]

프랑스 사를라·알비·앙비알레 김다은 기자 2024. 5. 22.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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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이 트랙터를 끌고 거리에 나섰다. ‘농부들의 나라’라 불리는 유럽에 그 어느 때보다 위기감이 높다. 이들은 자신들의 농업 유산에서 해법을 찾는다. ‘소규모 가족농’ ‘도농 연대’ ‘농정 자치’다.
유럽의 소규모 가족농에게 주 1~2회 열리는 농민시장은 직접 재배한 작물과 가공품을 판매하는 중요한 거점이다. 4월27일(현지 시각)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에 열린 사를라 시장.ⓒ대산농촌재단

부셰리 티어리 씨는 매주 토요일 아침 7시 무렵 집을 나선다.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주에 위치한 ‘사를라 라 카네다(Sarlat la Canéda·이하 사를라)’의 농민시장에 가서 직접 기른 작물을 팔기 위해서다.

9년 전 가업인 농장을 이어받은 티어리 씨는 지역 특산품인 송로버섯과 아스파라거스를 재배하고, 양과 닭도 기른다. 그는 단 두 가지 방법으로 농작물을 판다. 자신의 농장을 방문한 소비자들에게 직접 판매하거나, 이곳 사를라 시장에서 판매한다. 그것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라며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작은 좌판에 놓인 아스파라거스 한 묶음은 7유로(약 1만원). 4월27일(현지 시각) 오전 11시 무렵, 장이 선 지 3시간 만에 그가 준비한 아스파라거스 대부분이 동났다.

티어리 씨의 좌판으로 한 부부가 다가왔다. 프랑스 남서부 일대를 아내와 여행 중이라는 프레노 조엘 씨는 토요일에 큰 농민시장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 “미식가인 내가 빠질 수 없어서” 이곳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기농 작물을 재배한 생산자들을 직접 만나는 것은 농민과 연결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마을 농민시장에서 장을 본다. 낯선 지역을 방문할 때, 그곳의 농민시장을 둘러보는 것은 그에게 관광이 아니라 일상이다.

‘소규모 가족농’과 ‘도농 연대’는 유럽 농업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다. 그 아래에는 농업인들을 지원하는 독창적 기구가 있다. 정부로부터 위임받은 농업정책을 시행하는 동시에, 거꾸로 농민의 의견을 모아 정치적 목소리를 전달하기도 하는 농민자치기구 ‘농업회의소(chamber d’agriculture)’다. 유럽 농업을 알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기둥을 이해해야 한다.

여행 중 농민시장을 방문한 프레노 조엘 씨 부부. 평소에도 지역 시장을 이용해 장을 본다며 ‘농민과 만나는 일’이 기쁨을 준다고 말했다. ⓒ시사IN 김다은

유럽은 농업이 처한 위기에 대한 해법을 첨단기술이나 자본이 아니라, 오히려 농업이 오랫동안 지켜온 사회적 가치와 전통에서 찾고 있다. 지난 4월15~30일 〈시사IN〉을 비롯해 한국의 다양한 분야 농업인과 전문가 17명이 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프랑스 등 4개국 농촌 현장을 방문해 ‘오래된 미래’를 직접 둘러봤다. 농업·농촌 지원 공익재단인 대산농촌재단이 지원한 이 연수 프로그램의 제목은 ‘미래가 있는 농촌, 지속 가능한 농업’이다. 〈시사IN〉은 이번 호와 다음 호에 걸쳐 유럽 농업이 위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살펴보고, 국내 농업 현장에서의 적용 가능성을 짚어본다. ‘소규모 가족농의 가치’ ‘도시민과 농민의 연대’ ‘상향식 농정 자치’ 등의 키워드에 특히 초점을 두었다.

연수단이 방문한 국가들은 ‘농부들의 나라’라고 불린다. 공동체가 농촌의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에 속한 27개국은 농업정책도 공유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62년부터 시행된 공동농업정책(CAP, Common Agriculture Policy)이 그것이다. 농업의 경제적 가치는 2022년 기준 EU 전체 GDP의 1.4%에 불과하지만, 직불금 등을 비롯해 농업 지원에 투입되는 농업 예산은 EU 전체 예산의 3분의 1에 달한다. 2024년 전체 예산 중 2.8%가 농업 예산인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그만큼 가정의 식탁을 책임지고 자연환경을 유지하는 농업의 사회적 가치를 존중하는 모습이다.

한국은 이러한 유럽의 농업정책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며 국내 농업정책 설계에 적용해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2023년 발행한 연구보고서 ‘EU 공동농업정책 개편 과정과 시사점: 직불제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유럽의 ‘직접직불제’ ‘농장에서 식탁까지의 전략’ ‘유럽 그린 딜’ 같은 정책들은 한국에서 ‘공익직불제(2020년)’ ‘국가식량계획(2021년)’ ‘2050 농식품 탄소중립 추진 전략(2021년)’ 등의 이름으로 추진됐다.

지난 3월26일 유럽연합 본사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농민들이 유럽연합의 환경 제재와 값싼 수입농산물에 반대하는 트랙터 시위를 벌였다. ⓒEPA

하지만 ‘농부들의 나라’ 역시 최근 위기를 겪고 있다. 농가 수 감소, 고령화, 값싼 수입 농산물 등 조금씩 곪아온 문제에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환경규제까지 겹쳤다. 지난 1월에는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의 농민들이 트랙터를 끌고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이들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까? 이번 연수단이 유럽으로 향한 이유다. 선진 농업국의 우수 사례뿐 아니라 그들이 현재 처한 위기와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 역시 참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누적된 ‘농업 위기’는 여전히 길을 잃고 있다. ‘뼛골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농가당 연평균 농업소득이 1000만원도 채 되지 않는 현실(2022년 기준)에서 정부는 수년 전부터 농사 이외의 사업으로 농가 수익을 보존하도록 유도해왔다. 이 과정에서 “가공 중심의 2차 산업 육성에만 초점을 맞춰 농업인을 농부가 아니라 공장장이 되도록 하고(이동윤·화순 복숭아 농장주)” “농업인의 목소리는 반영하지 않은 상명하달식 공모 사업으로 예산을 좌지우지해 농정 자치의 힘을 약화시켜(고광석·고창 농촌중간지원조직 실무자)” “유기농법을 지키는 소농이 설 자리를 지웠다(강보리·보성 쌀농사 농부)”. 기업농과 대농만 살아남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라스 카즈 농장 내 위치한 농가주택. 1층에 직판장이 운영되고 있어 소비자들이 와서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 ⓒ김혜진 제공

■ ‘소규모 가족농’의 3가지 비결

프랑스 남부 지역 알비에 위치한 ‘라스 카즈(Las cases)’ 돼지 농장은 1985년 설립됐다. 40년간 대를 이어온 가족농이다. 이곳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농장 동물이 먹는 곡물을 직접 재배한다. 농장을 창업한 장 뤼크 말랭주 씨의 아들 티보 말랭주 씨는 평야 위에 솟은 ‘검은 산맥’ 누아르(noire)산을 가리켰다. 누아르산 아래 이곳 농장의 돼지 6000마리를 먹일 옥수수와 수수, 밀을 재배하는 110㏊(약 33만 평) 땅이 보였다. 처음에는 40㏊ 크기의 목초지에서 돼지 열 마리를 방목하며 시작했지만, 이제는 프랑스의 평균 농장 면적(2020년 기준 69㏊)보다 1.6배 큰 규모로 확대했다. 티보 씨는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동물 사료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사료를 자급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둘째, 라스 카즈 농장에서는 조리하고, 말리고, 자르고, 포장하는 모든 가공 공정을 직접 한다. 농장 부지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아치형 대문을 한 전형적인 2층짜리 농가주택이 보인다. 건물 1층은 손님들이 가공제품과 육류를 직접 보고 구매할 수 있는 매장으로 꾸며져 있다. 생고기는 물론 베이컨·햄·소시지·살라미 같은 염지 가공육과 파테, 통조림 등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진열되어 있다. 지하 조리실과 2층 건조실을 거쳐 나온 제품이다. 가공회사에서 며칠 만에 만들어내는 제품과는 속도와 정성이 다르다.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은 유리 통문을 통해 언제든 건조실 내부를 볼 수 있다.

돼지 농장에서 가공품을 생산하게 된 건 돼지고기 가격 등락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한 1985년에는 돼지고기 생산량이 너무 많아 가격이 곤두박질 쳤다. 사업 초기 아버지 말랭주 씨는 시장의 돼지 가격에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수익을 낼 방법을 궁리했다. ‘질 좋은 가공품’은 그가 찾아낸 대안이다. 돼지 가격이 떨어지면 가공품 마진이 올라가는 구조 덕분에 고깃값이 떨어져도 안정적으로 수익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는 ‘이웃’인 소비자의 요구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말랭주 씨는 “이웃들이 깨끗하게 사육하고, 안전하게 가공한 제품을 먹고 싶다고 하더라. 소비자들이 모두 이웃이니까 뭘 원하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가공제품을 만드는 농장은 많지만, 우리처럼 동물이 먹는 사료까지 직접 재배하는 곳은 드물다는 걸 이웃들도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라스 카즈 농장은 반경 20㎞ 범위 내에서 모든 제품 판매를 소화한다. 대형 마켓과 온라인으로는 판매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오고, 마을 축제가 있으면 얼굴을 보는 이웃이 주된 소비자다. 농장의 세 번째 특징이다. 농장 내 매장, 5㎞ 떨어진 소농 직판장인 레벨(Revel) 시장, 20㎞ 거리에 있는 알뱅크(L'albinque) 시장에서 생산품 대부분을 판매한다. 농장에서 생산하는 고기의 약 5%는 마을 식품점이나 레스토랑 등에 직접 납품한다.

온라인 상거래가 활발한 한국 사정에 비추면 이해하기 어려운 판매 방식이다. 함께 방문한 한국 농민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말랭주 씨 부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규모를 키워서 더 많은 제품을 팔 수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가족농 체제를 유지하는 게 우리의 철학이다. ‘내 이웃이 먹을 음식을 우리가 직접 키운다’는 게 우리 농장의 가장 큰 자부심이다.”

말랭주 씨는 농장을 대형화하지 않는 것이 농민에게도 이롭다고 설명했다. “축산의 규모가 커지면 농민들은 잘게 쪼개진 각각의 영역에 갇힌다. 사육·가공·유통 같은 공정 중 하나만 맡게 된다. 수익 규모가 커질지 몰라도 농부의 자율성은 떨어진다. 지금처럼 다양한 제품을 직접 개발하면서 소비자를 만나고, 우리에게 더 나은 사육 방식을 고민하는 것도 어려워질 것이다. 농업의 다양성이 위축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장 뤼크 말랭주 씨(가운데)와 티보 말랭주 씨(오른쪽)는 ‘이웃이 먹을 음식을 우리가 직접 만든다’는 원칙이 라스 카즈 농장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대산농촌재단

라스 카즈 농장은 1차 산업(생산)과 2차 산업(제조·가공), 3차 산업(유통)까지 가족들이 함께하며 가족농 브랜드를 강화해나가고 있다. 한국식으로 따지면 생산(1차), 가공(2차), 유통·민박·체험·관광(3차)을 융복합한 ‘6차 산업(농촌융복합산업)’이 모범적으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6차 산업’이라는 개념은 한국 농촌에서 유행한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동행한 국내 농업인들은 “지금의 한국형 6차 산업은 농촌의 위기를 극복할 해법이 될 수 없다”라고 입을 모았다. 출발점인 1차 농산물 생산 기반이 튼튼해야 지속 가능한 농업 전략이 되는데 ‘6차 산업'이라는 명목하에 기본을 놓치고 있다. 농업이 아니라 서비스업만 남았으며, 애꿎은 컨설팅 업체만 배불리는 부작용이 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프랑스 현장을 동행한 김혜진씨(거창 딸기 농장주)도 “외부 컨설팅 업체의 자문을 거쳐야 지원할 수 있는 공모 사업들이 있다. 그러나 조언을 받아보면 내용이 형편없는 컨설팅도 많다. 컨설팅한다고 비용은 비용대로 쓰지만 정작 농민들이 바라는 내용은 담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반면 유럽 농부들은 ‘기본’을 충실히 한다. 1차 생산물의 질을 올림으로써 농가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는다. 농업의 최종 목표는 ‘사람을 먹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산자는 음식을 통해 소비자, 지역사회와 연결된다. ‘이웃의 식탁을 책임지는 것’이 라스 카즈 같은 유럽 농가의 철학인 이유다.

장 폴 누벨 씨(왼쪽)와 파비엥 아시에 씨(가운데). 농민들이 직접 만든 공동농업지원협회(ATAG) 소속의 버지니 루설린 씨(오른쪽)는 정기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두 사람이 참여한 가엑 설립에 도움을 주었다. ⓒ대산농촌재단

■ 청년에게 기회 열어준 ‘공동농업그룹’

대부분 유럽 국가들이 그렇듯, 농업 대국인 프랑스에서도 농업인은 줄어들고 있다. 2020년 기준, 60세 이상 프랑스 농민 중 66%는 후계자가 없다. 후계자가 없어 방치될 위험에 놓인 농가 수가 향후 10년 동안 20만 개에 달하리라 추정된다. 이런 현실에서 프랑스 공동농업그룹인 ‘가엑(GAEC, Groupment Agricole d'Exploitation en Commun)’이 주목받고 있다. 현재 청년 창업농 두 명 중 한 명은 가엑 같은 공동체를 통해 농촌에서 안정적인 생산 기반을 만들고 있다. 가엑은 개별 소농이 토지·노동·자본을 공유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협동조합이다.

가엑은 1962년 만들어진 농업기본법에 근거한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농업의 현대화를 통해 식량 자급률을 높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다만 농장주 한 명이 고용인 여러 명을 두거나, 소수의 농민이 대규모 영농조합을 만드는 것을 ‘현대화’의 옳은 방향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프랑스 정부와 시민들은 소규모 협업농장을 대안으로 떠올렸고, 가엑은 그 대표적 모델 중 하나다.

프랑스 남부 타른에 있는 앙비알레 지역에서 축사를 운영하는 장 폴 누벨 씨 역시 7년 전 가엑에 가입했다. 1985년 도시에서 학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누벨 씨는 할아버지의 소 농장을 물려받아 본격적으로 농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프랑스 전통 소인 ‘블롱드 다키텐(Blonde d'Aquitaine)’을 사육하는데, 지역 내에서 처음으로 유통업자를 통하지 않고 소비자와 직거래를 시작했다. 누벨 씨는 타른 지역 내 육우 경진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한 인정받는 농업인이다.

누벨 씨와 아시에 씨가 속한 가엑에서는 프랑스 전통 소 60마리를 키우고 이들이 먹을 사료도 100% 자급한다. ⓒ대산농촌재단

2017년 4월, 연로한 어머니가 농장 운영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게 되자 누벨 씨는 귀농한 30대 농부 세 명과 가엑을 시작했다. 가엑은 최소 두 명에서 최대 열 명까지 가입할 수 있는데, 개별 소농들도 가족농처럼 함께 연대해 농업 활동의 안전망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가엑 설립에는 조건이 있다. 구성원 모두가 반드시 생산부터 가공, 유통 등 농업 활동 전반에 참여해야 한다. 각자 역할을 정확히 배분해 서류로 제출해야 한다. 농민협회 전문가와 함께 향후 그룹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분쟁에 대비하는 꼼꼼한 정관도 마련해야 한다. 농민의 선한 의지에만 기대 운영하는 조합이 아니다.

가엑은 특히 그동안 농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여성과 청년에게 기회를 열어줬다. 부부일지라도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묶이지 않고 개별적으로 가엑에 가입할 수 있다. 그 덕분에 여성 농민도 재산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 또 땅이 없는 청년에게는 안정적으로 농촌에 진입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누벨 씨와 함께 가엑에 들어온 파비 아시에 씨가 이런 사례다. 그는 농촌에 아무 기반이 없었지만, 공동 농업을 통해 누벨 씨와 함께 농사를 짓고 수익을 나눌 수 있게 됐다.

공동 자금으로 농업 장비를 구입하고, 가엑의 이름으로 보조금을 신청해 시설을 보수했다. 아시에 씨는 축사 위를 덮은 태양광 패널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가엑의 자금(20%)과 EU 보조금(20%), 민간 전기회사의 투자 비용(60%)으로 재생에너지 패널을 설치했다. 태양광으로 발생하는 수익은 일정 기간 전기회사가 가져간다. 그 이후부터 생기는 수익은 모두 가엑의 자산이 된다. 협동조합의 지속가능성을 보고 투자를 받은 셈이다.”

그는 도시에서 벌던 수익의 절반밖에 벌지 못해도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사방에 펼쳐진 푸른 밀밭에서 어미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진행한 농장에서 20분만 걸어가면 그의 집이 나왔다. “아침에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점심에는 같이 밥을 먹고, 가족들과 오붓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아시에 씨는 자신의 어릴 때 꿈이 농부였으며 지금 그 꿈을 이루었다고 뿌듯하게 말했다.

현장을 둘러본 유지황씨(경남 남해·팜프라 대표이사)는 한국의 농업 현장에도 가엑 같은 제도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반겼다. 유씨는 농촌에 정착하고자 하는 청년들의 기반을 지원하는 ‘팜프라’를 운영한다. 본인도 일곱 번 귀촌에 실패한 뒤 5년 전에야 마침내 남해에 터를 잡을 수 있었다. “한국의 농촌은 청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주거·농지·시설·기계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 농지은행이 있다고 하지만 원하는 땅을 구하기 쉽지 않고 가장 힘든 초기 정착 1~5년 차에 수익모델을 만들기 매우 어렵다.” 이런 청년농에게 농업기술과 네트워크 등 다양한 자원을 가진 ‘어른’ 농장주가 함께한다면 어떨까? “내가 가진 것을 내어줄 의사가 있는 농업인과 청년이 만나는 것. 그리고 서로 돌봄을 나누는 것. 그것이 가엑이 지키려는 농촌의 가치 아닐까.”

가엑에 참여한 이후 아시에 씨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는지 물었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소에게 먹일 콩 사료 값이 5배까지 치솟아 힘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가엑 구성원들에게 ‘우리가 직접 콩을 재배하자’고 설득했다. 동네 사람들은 무모한 일이라며 말렸지만, 가엑 구성원은 그를 믿어주었고 8개월의 시도 끝에 마침내 콩 재배에 성공했다. 이제 그가 속한 가엑에서 운영하는 소 농장은 사료를 100% 자급자족한다. 아시에 씨는 만약 혼자 농사를 지었다면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비록 가족이 아닐지라도, 사회적 계약으로 맺어진 농업 공동체는 이처럼 지속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는 농업의 씨앗이 되고 있다.

프랑스 사를라·알비·앙비알레 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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