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적 박탈·불신임·수사…34살 최연소 여성의장 ‘청년정치 수난기’

정대하 기자 2024. 5. 2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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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미 전남 강진군의회 의장
김보미 강진군의회 의장이 지난 1월25일 서울 국회 앞에서 이현택 전남도당 청년위원장, 오현식 전국지방의원협의회장과 함께 청년 정치 탄압을 중단하라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민주당 전남도당 청년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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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가’ 청년 정치인의 조급함이 부른 역풍일까, ‘젊고 잘난’ 여성 정치인을 두고 못 보는 늙은 남성 카르텔의 몽니일까?

재선 군의원이자 최연소 기초의회 의장으로 전국적 주목을 받은 30대 여성 정치인이 같은 당 소속 군의원들로부터 불신임 위기에 몰리고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경찰 수사까지 받는 등 수난을 겪고 있다. 전남 강진군의회 의장 김보미(34)다. 1989년 12월생인 그는 2018년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강진군의회 비례대표에 당선된 뒤 당적 박탈과 복당, 지역구 출마와 군의원 재선, 의장 당선과 불신임안 발의 등 30대 청년이 좀처럼 겪기 힘든 ‘롤러코스터 정치 역정’을 지난 6년 새 경험했다.

우여곡절 끝에 불신임안은 철회되고 경찰 수사도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났지만, 최근 추가경정예산안 심사에서 의회 사무과 예산의 99%가 삭감되면서 의장으로서 운신 폭이 크게 제한됐다. 이 또한 같은 당 소속 동료 의원들이 똘똘 뭉쳐 벌인 일이다.

“쉽지 않네요. 주변에선 사퇴 안 하고 버티는 게 용하다고 해요.”

말을 마치자마자 긴 숨을 내쉬었다. 지난 8일 강진 마량면의 찻집에서 만난 김보미는 “작년에 불신임 결의안이 올라왔을 때 의장을 그만두려고 했다”고 말했다. 강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지방정치판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경력의 소유자다. 전남대 미대에서 조소를 전공한 뒤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한 그는 군의원에 출마한 도예가 아버지를 도우며 지방정치에 처음 발을 들였다. 2014년 제6회 지방선거 때 일이다.

출마한 아버지 돕다가 군의원 도전

무소속이었던 아버지는 낙선했으나 김보미는 그 일을 계기로 강진에 눌러앉았다. 도자기를 빚어 파는 ‘강진탐진청자’라는 공방의 대표이자 도예인으로 활동하며 젊은 예술인들을 규합해 한국청년문화예술인협회를 꾸렸다.

4년 뒤인 2018년 제7회 지방선거 때는 직접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민주당에 비례대표 공천 신청을 했다. “주변에선 ‘그러다 상처만 받는다’고 말리는 분들이 많았어요. 스물여덟 먹은 ‘애’가 군의원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얼마나 무모해 보였겠어요?”

지역정치 지망생들의 필수 코스인 봉사단체, 관변단체 활동 경험이 일천했으니, 경쟁자들은 김보미를 ‘듣보잡’(별것도 아닌 존재) 취급했다. 하지만 지역의 당 상무위원들을 상대로 열심히 얼굴과 다리품을 판 결과 당내 경선에서 후보직을 거머쥐었고, 본선에서 큰 어려움 없이 배지를 달았다. 언론은 그에게 ‘전라남도 최연소 군의원’이란 타이틀을 붙여줬다.

1년차 군의원 때인 2018년 12월, 한달 의정활동비와 월정수당 전액을 이웃 돕기 성금으로 기탁했다. 이런 연말 기부는 6년째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수직적 줄세우기’와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오랜 관행이 지배하는 지방정치는 20대 청년이 감당하기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군의회 의장 선거 때부터 탈이 생겼다. 당이 내려준 ‘오더’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적을 박탈당한 것이다. 김보미의 복당은 민주당이 ‘20대 표심’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서야 가까스로 이뤄졌다.

2022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구에 공천 신청을 했다. 동네에선 ‘당에 밉보인 전력이 있어 공천받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당이 실시한 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1위를 해 기어코 공천장을 거머쥐었다. 본선에서 강진군 최다 득표로 재선 군의원이 됐다.

김보미 강진군의회 의장이 의회 본회의 의사일정을 진행하고 있다. 군의회 누리집 갈무리

내친김에 전반기 군의회 의장에 도전했다. 2022년 7월 아버지뻘인 동료 의원과의 경선에서 6 대 2로 승리해 전국 최연소 기초의회 의장이자, 강진군의회의 첫 여성 의장이 됐다. 김보미는 ‘젊은 의장이 이끄는 의회니 이전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민 간담회 횟수를 늘렸고, 의회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군의회 누리집에 공개했다. 본회의와 상임위원회의 유튜브 생중계 시스템도 구축했다.

노골화하는 동료의원의 견제

그러나 ‘30대 의장’ 김보미의 의욕적 행보는 마냥 순탄치 않았다. ‘선배들한테 사전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의회 운영을 자기 생각대로 끌고 가려고 한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새어나왔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한 군의원은 “젤로 어린 친구가 최다 득표를 했으니 정치적으로 커나가길 바랐는데, 초반부터 상의도 없이 일을 벌이는 모습을 보니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전체 의원 8명 가운데 7명이 민주당 소속인 군의회에서 김보미를 향한 견제는 시간이 갈수록 노골화됐다. 의장 임기 2년차에 접어든 지난해 4월 경찰이 김보미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걸어 수사를 시작했다. 경찰은 ‘의장의 위법행위에 관한 첩보를 입수했다’고만 했다. 동문 체육대회 참석자들에게 김보미가 농축산물을 ‘찬조’했다는 것이었다.

“날짜도 잊어먹지 않아요. 작년 4월15일. 동문 체육대회 가서 늘 하듯이 축사만 하고 왔습니다. 근데 내가 거기서 참석자들한테 선물을 돌렸다는 거예요.”

강진경찰서는 6개월이 지난 지난해 10월에야 ‘혐의 없음’으로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김보미는 “저와 의회 사무과 직원들은 몇달 동안 경찰 조사를 받느라 피 말리는 시간을 보냈으나, 억울함을 호소할 곳은 없었다”고 했다.

김보미가 다른 군의원들과 결정적으로 틀어진 건 올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지난해 말부터 본격화된 지역구(전남 고흥·보성·장흥·강진) 국회의원 후보 경쟁이었다. 김보미를 제외한 대다수 군의원들이 현역 국회의원인 김승남 의원을 돕고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김보미는 경선과 거리를 뒀다. 군의원들이 국회의원 후보 선출 과정에 연루되는 것 자체가 경선의 공정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선택에는 대가가 따랐다.

“국회의원 후보 경선 때 당 지역위원회 카톡방에서 제가 빠져 있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저를 제외한 군의원들이 국회의원, 군수와 지역 행사장에서 찍은 사진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왔고요.”

군의원들 “따돌림은 김보미가 자초”

‘따돌림 논란’에 다른 군의원들은 “김 의장이 자초한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군의원은 “의회 홍보비 문제로 김 의장뿐 아니라 우리도 경찰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무혐의 받았다고 중앙당 가서 ‘청년 정치인 탄압’이라고 기자회견을 해서 동료 의원들을 이상한 사람 만들어버리더라. 그런 친구를 누가 가까이하고 싶겠느냐”고 반문했다.

강진군의원들은 급기야 의장 불신임 카드까지 꺼냈다. 재적 의원 8명 가운데 김보미와 다른 군의원 1명을 제외한 6명이 불신임 결의안을 발의했다. 이유는 두가지였다. 경찰 수사에 대한 사과 부재, 그리고 동료 의원에 대한 모욕과 품위유지 의무 위반.

“제가 의장 자리에서 쫓겨나야 할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설명을 못 해요. 무슨 법이나 규정을 어찌어찌 위반했다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정치를 시작한 것에 처음으로 환멸이 느껴지더라고요.”

사퇴를 고민했지만, 주변에서 “사퇴하면 허위 사실을 다 인정하는 꼴이 된다. 절대 그만두면 안 된다”고 김보미를 설득했다. 민주당 전남도당 청년위원회가 ‘청년 정치인 죽이기’라며 공개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이 문제는 중앙당에서도 이슈가 됐다. 결국 군의원들은 1월15일 결의안 발의를 철회했다.

‘줄세우기’의 배후로 지목된 김승남 국회의원은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했다. 그는 지난 9일 전화 통화에서 “지방의원들을 줄세운 적이 없다. 군의원들이 김 의장 불신임 결의안을 냈다는 걸 뒤늦게 알고 발의한 군의원들을 네차례나 만나 철회하라고 설득했다. 당내 경선을 앞두고 경쟁 후보가 ‘줄세우기’ ‘청년 정치 죽이기’ 프레임을 이용하는 바람에 내 처지가 곤란해졌다”고 했다. 김 의원은 지난 3월 당내 경선에서 문금주 후보에게 패해 총선 출마가 좌절됐다.

강진을 사랑하는 더불어민주당 청년당원들과 김보미 강진군의회 의장이 지난 1월16일 강진군청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강진을 사랑하는 더불어민주당 청년당원 제공
전국 기초자치단체의회 최연소 의장인 김보미 전남 강진군의회 의장이 지난 8일 강진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총선이 끝났지만, 김보미를 겨냥한 군의원들의 공세는 계속됐다. 지난달 23일 열린 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의회 사무과 예산 5억8400만원 중 99%가 삭감되고 850만원만 반영됐다. 지난해 12월 2024년도 본예산 심의 과정에서 의회 사무과 예산 9억7천만원 중 51%인 5억원이 삭감된 것을 이번 추경에 다시 요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군의회 예산결산위원회는 “의장과 의회 사무과가 홍보비 등 예산을 방만하게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예산을 삭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예결위 소속 한 군의원은 “일부 사무과 직원들이 의장한테만 잘하고, 의원들은 제대로 대우를 안 하고 ‘패싱’한다”며 예산 삭감에 의장과 사무과 직원들에 대한 ‘사감’이 작용했음을 시인했다.

풀뿌리 정치 움직이는 ‘기득권 카르텔’

김보미의 ‘수난기’는 한국의 청년 정치인들 앞에 놓인 현실이 여전히 험난함을 보여준다. 선거철이 되면 여야 정치권이 청년층 표심을 겨냥한 ‘젊은 정치’를 내세우지만, 정작 청년 정치인들이 성장해야 할 풀뿌리 정치판에선 여전히 지역구 국회의원을 정점으로 형성된 수직적 위계질서와 50~60대 남성들이 주도하는 기득권 카르텔이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유권자 변동이 적은 소도시, 농촌 지역으로 갈수록 연장자 중심의 위계적 정치 문화가 강하게 잔존해 청년 정치인의 진입과 성장을 어렵게 한다”고 했다. 게다가 견제할 시민사회의 힘이 약하니 지역구 국회의원이 ‘영주’처럼 군림하며 공천과 인사를 쥐락펴락한다. 이런 지역정치에 출구가 있을까? 지 교수는 “정당에 인턴 제도를 활성화해 청년 때부터 당직자와 예비 정치인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젊은 정치인들이 기초의원에서 시작해 광역의원, 단체장, 국회의원 등으로 자생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제도와 정치 환경을 만드는 게 시급하다”고 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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