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썰] "내 탓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위로 건넨 5.18 성폭력 피해자들

임예은 기자 2024. 5. 22.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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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대신 이름 드러낸 5.18 성폭력 피해자들
피해자 10명 자조모임 '열매'로 활동 이어갈 계획
〈사진=지난 17일 JTBC 방송본〉
44년입니다.1980년 5월 광주 시민이라서, 그 중에서도 여성이라서 겪은 상처를 털어놓기까지 걸린 시간입니다. 시위 현장에서 연행될 때나 조사를 받을 때… 계엄군의 성폭력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사진=지난 17일 JTBC 방송본〉
스물 세 살 이남순 씨, 직장을 가려면 지나야하는 금남로에 다친 채 널브러진 학생들을 데려다 치료하는 게 일이 됐습니다. 광주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고,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붙잡혔습니다. 시키는 대로 지프차에 오르다가 대검에 성기와 엉덩이를 찔렸습니다. 심한 하혈에도 진통제 처방만 받았을 뿐 별다른 치료 없이 한 달을 유치장에 갇혀 살았습니다. 난소와 자궁을 잃었습니다.

열 아홉 살이던 또 다른 여성 김모 씨, 애인이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홀린 듯 전남도청으로 향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귀를 찢을 듯한 총성과 함께 들이닥친 계엄군에 붙잡혔습니다. 상무대에서는 상·하의를 벗은 채 조사받았습니다.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고, 다녀오는 길에 헌병에게 강제 추행과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평범했던 일상을 잃었습니다.

피해자 번호 32번 그리고 35번. 한 사람을 지칭하는 새로운 수식어는 그렇게 생겼습니다.

1980년 전과 후의 '나



JTBC는 지난 14일부터 이틀에 걸쳐 전남 곡성과 담양에서 5.18 성폭력 피해자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기자 선생님 말씀대로 내가 사람을 좋아하긴 하나 봐. 내 것이 없어서 그러지."

이남순 씨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교회 권사님부터 동네 이웃 어르신들께 넘치는 예쁨을 받았습니다. 그 덕인지, 늘 활발했습니다. 1980년 5월까진 그랬습니다.

피해자 번호 32번 여성은 활발한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애써 당당한 척 살았지만, 새로운 사람 사귀는 걸 반쯤 포기했습니다. '나에 대해 뭘 알고 싶은 게 있나?' 의심이 생기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사진=미국 생활 당시 이남순씨 사진, 지난 17일 JTBC 방송본〉
5.18 관련자라는 사실만으로 가족과 고향을 떠나 20년간 미국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가족은 그를 외면했지만, 단 한 번도 가족을 원망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웠습니다. "비행기가 낮게 뜨는 날이면, 그 꼬리를 팔짝 뛰어 붙잡고 부모님을 보러 한국에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동생들에게 피해가 가진 않을까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니 성폭행 사실은 입 밖으로 꺼낼 생각조차 안 했습니다. 본인 스스로 여자가 아니라고, 여자이고 싶지 않다고 다그치는 나날의 반복이었습니다.


〈사진=5.18 성폭력 피해자(35번)가 직접 그린 그림〉

"경제적으로 자립을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항상 제 자신을 여미면서 살았다 할까요?"

열아홉의 김 모 씨, 책 읽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습니다. 이른 나이부터 부모님을 도와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늘 하나 없었습니다. 나만의 화실을 운영하고 싶다는 꿈도 있었습니다. 1980년 5월까진 그랬습니다.

피해자 번호 35번 여성은 꿈을 꾸는 대신 현실과 타협해야만 했습니다. 남자친구가 죽어 힘들어 하는 거라고 생각한 어머니 권유로 이른 나이 결혼했습니다. 남편과 자식이 잘 먹고 잘살게 하는 게 삶의 우선순위가 됐습니다. 매일 꾸는 악몽에 참다못해 남편에게 성폭행 피해 사실을 털어놨습니다. 이게 한 평생 약점이 됐고, 그 뒤로 용기 내는 법을 까먹었습니다.

상처를 세상에 드러내기까지



2020년 5월,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 조사에 나섰습니다. 피해자들은 갑작스레 과거를 묻는 이가 불쾌하고 당혹스러웠습니다. 이남순 씨는 "남의 사생활을 왜 캐묻냐, 당신들 뭐하는 사람이냐" 소리쳤지만, '이제는 털어놔도 된다'는 말을 듣고 겨우내 입을 뗐습니다. 김 모 씨도 애써 숨기고 싶었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나, 둘 증언이 모였습니다. 스스로 역사의 증인이 되길 택했습니다.

"그날은 이상하게 전화를 끄기 싫었는데, 밤늦게 전화가 왔더라고…"

진상규명 결정이 난 날, 전화기 너머 들리는 소식에 이남순 씨는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습니다. 그때의 국가는 나를 외면했지만, 이제라도 아픔을 알아준다는 사실이 감사했습니다.

〈사진=지난 17일 JTBC 방송본〉
약 3년간 조사에 응한 이들은 모두 19명. 위원회는 이 중 성폭력 피해 사실 16건에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습니다.

지난 40년을 꺼내 위로하다


〈사진=지난 17일 JTBC 방송본〉

지난 4월 5.18 성폭력 피해자 10명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초면인데 희한하게 서먹하지 않았고 반가웠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만큼은 이름 세 글자와 저마다 경험한 상처를 드러냈습니다. 지난 세월 버텨온 나를, 또 그들을 다독였습니다.

"나를 사랑했다고 다독여주라고 고생했다고 하는데 눈물 콧물 다 터져 나오는 거야. 내가 남들 앞에서 우는 사람이 아닌데…"

상처와 함께 꾹꾹 눌러온 지난 날의 감정이 터져버렸습니다.그 순간의 이남순 씨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아파하고 상처에 공감했습니다. 김 모 씨는 "여성으로서의 상실감과 자신을 깎아내리는 아픔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위로를 그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건넸습니다.
〈사진=지난 17일 JTBC 방송본〉

"우리 탓이 아니잖아요. 제 탓이 아니잖아요."

이 말을 입 밖으로 내기까지 오래도 걸렸습니다. '여자가 얼마나 거칠었으면 시위 현장에 나가 몹쓸 짓을 당하냐' 손가락질당할 게 뻔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그리 본다는 걸 압니다. 그래도 이젠 1980년 5월의 악몽을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여성이기에 무력하게 당한 상처"로 정의할 만큼 마음이 단단해졌습니다.

아픈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힘을 얻었습니다. 이남순 씨는 "나만 보고, 나만 사랑하고 앞으로 씩씩하게 항상 웃으면서 앞뒤 재지 않고 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김 모 씨도 "그동안 잘 참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좋다"고 웃어 보였습니다.

〈사진=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피해자들은 '열매'라는 이름의 자조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오는 6월 26일 위원회가 활동을 마치는 데 그 이후에도 함께 하겠다는 일종의 약속입니다. 6월 초부터는 본격적으로 정신적 피해 손해 배상 청구 소송 등 법적 대응에 나설 예정입니다. 피해자 16명의 의사를 확인하는 중인데 10명 조금 넘게 힘을 합치기로 했습니다. 윤경회 조사4과 팀장은 "개별 소송보다는 집단 소송이 유리하다고 해서 피해자들께 설명하고 있다"며 "최종적인 확인이 필요하지만, 간담회 미참석자 중 소송에 뜻을 밝힌 분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겪은 상처와 아픔은 다시는 반복돼서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평생을 괴롭게 한 국가폭력에 다시 노출되는 한이 있더라도 1980년 5월 금남로로, 전남도청으로 향하겠다고 말합니다.

본인들과 비슷한 상처를 입은 뒤 어딘가 숨어 있을 여성들에겐 이렇게 진심을 건네봅니다.

"창피할 줄 알았는데 털어놓고 나니 차라리 편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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