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급 전범 죄 물어야” 주장한 日황족을 아시나요
“참 희한한 일이야.” 2008년 국제로타리클럽 회장으로 미국 시카고에 가 있던 이동건(86) 부방테크로스 회장은 일본 도쿄 남쪽을 관할하는 로타리 지구의 차기 총재를 보고 감탄했다. 숱한 외국인과 만났으나 그토록 품격 있고 예의 바른 일본인은 처음 봤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쇼와(昭和) 일왕의 조카로 옛 왕족(일본에선 ‘황족’)인 구니 구니아키(九邇邦昭·95)란 인물이었다. 영친 왕비 이방자 여사와는 5촌 관계였다. 그런데 “조용하면서도 따스한 그의 자세나 풍모에서 일본 귀족의 오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 이 회장은 구니가 2015년 썼던 자서전 ‘소년 황족이 본 전쟁’(고요아침)의 한국어판을 냈다. 번역과 출판에 따르는 제반 비용을 사비로 충당했고 책에 ‘엮은이’로 이름을 올렸다.
당연하게도 구니는 ‘금수저’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저녁이면 가족 모두가 2층 서재에 모여 SP 레코드를 틀어 놓고 행복한 표정으로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오리고기와 닭고기를 먹고 나면 시녀들이 수돗물이 나오는 방에서 설거지를 했다. 그러나 왕족의 장남은 반드시 군인이 돼야 했기에 16세 때인 1945년 4월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넉 달 뒤인 8월 일제는 패망했다.
그리고 1947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일왕 일가와 일왕 동생의 가족을 제외한 왕족의 왕적(王籍·일본에선 ‘황적’)을 박탈했다. 구니는 ‘평민’이 됐다. 해운회사 총무과에 면접을 본 뒤 입사했고, 유럽 등에서 해운업 관련 직장 생활을 하는 등 옛 왕족의 입장에선 ‘평범한’ 삶을 살았다. 퇴직한 뒤 이세(伊勢) 신궁의 대궁사(신궁을 지키는 우두머리)를 지내는 등 신도(神道)를 비롯한 일본 문화에 깊은 애착을 지니고 있다.
그는 책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며 반전(反戰)의 목소리를 냈다. “소위 A급 전범들, 나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지만, 인격적으로 뛰어난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개전(開戰)을 결정했다는 의미에서 죄를 마땅히 묻게 돼야 할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이 합사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낸 구니는 “일본인의 자기주장의 연약함, 주위를 둘러보고 결국은 적당히 얼버무리게 돼버리는 특성, 국민 전체의 군중 심리, 언론의 선동, 경거망동한 버릇 등 일본의 기질 문화에 대해 엄격하게 반성해야 한다”며 전쟁을 반대하지 못한 국민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다.
“식민 지배로 아시아 사람들을 괴롭힌 점을 자각하고 그것에 대해 상당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 역시 잊지 않는다. “피해를 준 사실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상식에 맞는 배상을 하고 발전적인 상호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왜 (한·일 관계의) 초기 단계 때 하지 않았던 것일까?”라고 묻는다. 다만 쇼와 일왕을 ‘끝내 내각의 최종 결정을 반대하지 않았으나, 전쟁을 피하려 노력한 평화주의자’였다며 다소 옹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점에선 왕족 출신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책을 엮은 이동건 회장은 모기업인 부산방직을 생활가전기업 ‘쿠첸’에 이어 수(水)처리 선도 기업인 부방테크로스로 키워낸 기업인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도 지낸 이 회장은 “물건을 파는 장사꾼의 삶과 남을 돕는 사회봉사인의 삶을 함께 걸어왔다”고 했다. “어린 시절 6·25를 겪었어요. 안강 전투의 포성이 생생히 들리던 경주 양동마을에서 자라 ‘전쟁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될 일’이란 공감대가 있습니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의 집무실 책장에선 극작가 신봉승이 1985년 쓴 48권 분량 ‘조선왕조 500년’도 보였다.
구니 구니아키의 책을 국내에 낸 이유에 대해선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 그리고 결코 모든 일본인이 전쟁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국내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구니 구니아키
1929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구니노미야 가(家)의 2대 당주 구니요시가 그의 조부였고, 그의 고모부는 쇼와 일왕이었다. 1945년 4월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뒤 4개월 만에 일제가 패망했다. 1947년 ‘평민’으로 강등됐다. 이후 해운업 등 직장 생활을 하다 이세 신궁의 대궁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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