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칼럼]대통령이 일할수록 나라가 나빠져서야

이진영 논설위원 2024. 5. 21.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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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직구 금지’는 그래도 3일 만에 철회
대통령 앞장선 R&D 예산 삭감, 의대 증원
제때 제동 못 걸어 이공계 의료계 쑥대밭
“정책 사전 검토 강화” 대통령실부터 하라
이진영 논설위원
‘해외 직구 금지’ 논란을 보고 두 번 놀랐다. 경제통인 국무총리 주재로 14개 부처가 관련 회의를 20번 넘게 하고도 소비자 편익에 눈 감은 대책을 내놓은 데 놀랐고, 소비자들이 ‘직구 계엄령’이라며 반발하자 3일 만에 대책을 철회한 속도에 놀랐다. 처음부터 잘했어야 하지만 잘못했을 때 늦지 않게 멈추는 것도 실력이다.

만약 대통령이 국내 기업 보호와 소비자 안전을 위해 직구 금지 지시를 내렸다면 이렇게 빨리 철회할 수 있었을까. 대통령이 앞장서다 제때 제동이 안 걸려 국민 피해와 여당의 정치적 부담을 키운 사례가 적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대통령실이 전담조직까지 두고 뒤늦게 올인한 부산엑스포 유치전이 그랬고 대통령의 수능 직전 킬러 문항 적폐 몰이가 그랬다. 부산엑스포는 사우디 대세론에도 “역전 가능하다”며 기업까지 동원해 열을 올리다 국력만 낭비하고 끝났다. 킬러 문항 배제 지시는 입시 혼란과 N수생 증가로 사교육비를 늘리고 시험 망친 학생들에게 ‘킬러 문항 지시 탓’이라 할 빌미만 줬다.

그 어떤 정책 헛발질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의대 증원만큼 두고두고 나라를 골병들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과학기술계의 ‘이권 카르텔’을 겨냥해 “나눠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한 때가 지난해 6월이다. 올해 R&D 예산은 33년 만에 뭉텅이로 잘려 나갔고, 카르텔에 끼지도 못하는 계약직 신진 연구자들만 줄줄이 일자리를 잃는 바람에 연구의 대가 끊겨버렸다. 지난 총선에서 충청권의 얼음장 민심을 확인한 후로는 다시 “성장의 토대인 R&D는 예비 타당성 조사를 폐지하라”는 지시다. 깜깜이 예산으로 카르텔들 나눠 먹기 하라는 뜻인가.

일을 저질러 놓고 수습도 못하기는 “2000명은 그냥 나온 숫자가 아니”라며 대통령이 밀어붙인 의대 증원도 마찬가지다. 최근 의대 증원을 허용한 법원 결정에 대해 ‘정부의 승리’라고 하지만 그건 전공의들이 복귀할 때나 할 수 있는 얘기다. 전공의가 안 돌아오면 전문의, 공보의, 군의관 배출에도 줄줄이 차질이 생긴다. 필수의료 지방의료부터 죽어 나가고 전공의가 없어 수련병원들 도산하면 병원과 거래하던 제약회사 장비업체 약국 식당들을 포함한 주변 생태계까지 망가질 것이다.

전공의 협박과 설득에 실패한 정부가 새로 내놓은 대책이 외국 의사 도입이다. 원래는 외국 의사가 국내에서 환자를 보려면 정부가 지정한 38개국 159개 의대 출신에 한해 해당 국가 의사 면허를 딴 뒤 우리나라 의사면허 예비시험과 국가고시를 통과해야 하는데 한시적으로 국적 대학 따지지 않고 의사 면허만 있으면 받아준다는 것이다. 한국말 하는 외국 의사도 드물겠지만 원가도 안 쳐주는 필수의료 하겠다고 들어올 의사가 몇이나 되겠나. 온다고 해도 문제다. 힘 있는 사람들은 정부가 최고 등급을 준 지역 대학병원도 못 미더워 서울 병원 명의를 찾으면서 서민들에겐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건너뛴 의사들에게 몸을 맡기라는 건가.

대통령이 주도한 정책들은 ‘미스터리’로 회자된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기에 부산엑스포 급발진을 하고 R&D 카르텔, 킬러 문항, 의대 증원 2000명을 밀어붙이는지 그때마다 비선을 점치는 뒷말들이 무성했다. 정책적 맥락과 근거도 모호한 즉흥적 지시라도 참모나 장관들이 ‘격노’를 무릅쓰고 반대하거나 ‘플랜B’를 준비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킬러 문항 논란엔 “대통령은 입시 전문가”, 의대 증원엔 “의사 파업 시 전세기 띄워 환자를 해외로 보낸다”며 지시 사항을 정당화하기 바쁘다. 대통령이 엉뚱한 곳에 활을 쏘면 그에 맞춰 과녁을 그려주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탈이 나고 지지율도 떨어지는 것이다.

이번에는 대통령실에 민생물가 TF를 꾸리고 저출생수석실을 만든다고 한다. 대통령이 나서겠다 하면 물가가 잡히겠거니, 출산율이 오르겠거니 기대해야 하는데 ‘이번엔 또 뭔 일을’ 하는 걱정부터 앞선다. 저출생 정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기획원 모델로 대응”이라며 밀어붙이기를 예고한 상태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1978년 개혁개방의 기치를 들면서 “맨발로 미끄러운 돌을 살살 밟으면서 강을 건너자”고 했다. 당심이 민심인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개혁은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대통령은 직구 금지 소동에 사과하며 “정책의 사전 검토와 국민 의견수렴 강화, 정책 리스크 관리 시스템 재점검”을 지시했는데 대통령실부터 그리해야 한다. 대통령이 나설수록 나라가 나아지기는커녕 현상 유지도 못하고 더 나빠진다는 말이 나와서야 되겠나.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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