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소송’ 법정선 초등학생 “기후재난으로 제 농부 꿈 포기해야 되나요”

옥기원 기자 2024. 5. 2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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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마지막 공개변론…청구인 3명 직접 발언
“허울뿐인 정책·말 아닌, 명확한 책임·안전 원해”
한국 정부의 기후 변화 대응이 헌법에 합치하는지를 묻는 기후소송 두 번째 공개 변론이 열린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최종 진술자 3인 중 한 명인 한제아 아기기후소송 청구인이 최후 진술문과 `반드시 행복은 오고야 만다\'는 꽃말의 메리골드 종이꽃을 손에 들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빠진다면, 제가 꿈꾸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 모릅니다.”

한국 정부의 기후변화 대응이 헌법에 합치하는지를 묻는 국내 최초의 ‘기후소송’ 최종(두번째) 공개 변론이 이뤄진 21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선 한제아(12) 어린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한씨는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가 너무 낮아 미래세대 생명권과 행복추구권 등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2022년 ‘아기기후소송’을 낸 62명의 어린이 중 한 사람이다.

한씨는 2020년 3월부터 같은 취지로 헌법소원을 제기한 김서경(청소년기후소송)·황인철(시민기후소송) 청구인과 함께 ‘복잡한 법 용어가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 이 소송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기 위해’ 이날 헌재 발언대에 섰다. 법정으로 향하는 세 사람의 손에는 ‘우리의 권리를 지킬 판결’이라는 팻말과 종이로 접은 국화과 꽃 ‘마리골드’가 쥐어져 있었다. 마리골드의 꽃말은 ‘반드시 행복은 오고야 만다’다.

한씨가 기후소송에 참여한 건, 2년 전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의 장래 희망 중 하나는 “감자·고구마를 키우는 농부가 되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기후위기 대응 중요성을 배우고, 학교 주변 쓰레기를 줍거나 나무를 심는 ‘환경보호 지킴이’로 활동하며 배운 그대로 실천하며 농부가 되길 꿈꿔왔던 그가 기후소송에 나선 것도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을 것이다. “2022년 여름, 하루 동안 엄청난 비가 쏟아져 집 건물 1층이 물에 잠기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잖아요. 기후위기로 지구에 사는 많은 생명이 위태롭게 됐다고 여겨졌어요. 제가 이 자리에 선 건, 2살 된 사촌 동생과 가족, 친구, 동물 등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그는 5분 남짓한 공개 변론에서 할 말을 고르기 위해 전날까지 울고 웃기를 반복하며 발언문을 고쳤다. “긴장해서 밥도 먹지 못한” 채 법정에 섰지만, “어른들이 기후위기 해결 문제를 우리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 같다”는 한씨의 목소리는 크고 또렷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지난달 1차 공개 변론 당시 방청석에서 기후소송을 지켜봤는데,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높게 세워 실패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는 게 낫다’는 정부 쪽 설명을 들으며 앞으로 발생할 기후위기를 미래세대가 해결하라고 떠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며 “지금 할 수 있는 걸 나중으로 미룬다면 우리의 미래는 물에 잠기듯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기후 변화 대응이 헌법에 합치하는지를 묻는 기후소송 두 번째 공개 변론이 열린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후소송 원고 단체와 공동 대리인단이 기자회견을 열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참가자들은 `반드시 행복은 오고야 만다\'는 꽃말의 메리골드를 손수 접어 들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한씨와 함께 발언대에 선 김서경(22)씨는 공개 변론 시작 전 한겨레와 만나 “눈앞에 벌어진 기후위기 앞에서 정책 결정자들의 자발성만을 믿고 기다릴 수 없어서 헌법소원이란 방법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헌법소원을 제기한 뒤 4년 동안 지구 평균온도 상승을 1.5도 내로 막아 안전한 삶을 보장해달라는 청소년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제대로 된 기후정책이 없었어요.”

김씨는 이와 관련해 2021년 5월, 탄소중립 로드맵 설계를 위한 대통령직속 탄소중립위원회에 청소년 위원으로 참석했던 경험을 들려줬다. “당시 의견을 내도 실제로는 반영이 하나도 안 된다는 걸 느꼈어요. 사실상 산업계의 부담을 줄여주는 쪽으로 방안을 다 짜놓고, 청소년 위원 등은 (각계 의견을 수렴했다는) 명분을 세우기 위해 들러리를 세운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국가의 기후위기 대응이 참 부실하다고 느꼈습니다.”

한국 정부의 기후 변화 대응이 헌법에 합치하는지를 묻는 기후소송 두 번째 공개 변론이 열린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최연소 기후위기 소송 청구인 최희우(2) 어린이와 어머니 이동현 씨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시민기후소송 대표자로 발언대에 선 황인철 녹색연합 기후에너지팀장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법 제정을 청원하고 정부 관계자를 만나고, 거리 시위를 해도 정부와 국회의 응답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기후운동을 하며 사과 농사를 망쳐버린 농부, 열사병으로 쓰러진 건설노동자, 폭우를 걱정하는 반지하방 거주 주민 등 기후위기가 우리 사회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장면을 목격해왔다”며 “‘기후위기는 인권의 문제’라는 국가인권위의 의미 있는 판단도 있었지만, 정부 정책을 강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한씨를 비롯한 세 사람은 재판관 9명을 향해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미래세대를 위해 현명한 판단을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이 소송은 단순히 국가가 기후 대응을 얼마나 못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게 아니라 정부가 배제한 우리의 권리를 되찾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허울뿐인 정책과 말이 아니라, 명확한 책임과 안전을 원합니다.”

옥기원 기자 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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