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자욱한 날, 낡은 미제 헬기를… 이란 대통령의 선택 왜?

이철민 기자 2024. 5. 2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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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부품 조달 쉬운 1992년 생산 러시아 중형 헬기 밀(Mil)-17도 여러 대 보유

20일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의 사망이 공식 발표됐다. 이란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라이시 대통령은 19일 이란 북동부의 동(東)아제르바이잔 주에서 열린 수력발전 댐 완공식에 참석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는 도중에 악천후와 짙은 안개, 기술적 결함 등의 요인으로 탑승한 미제(美製) 벨-212 헬기가 산악 지대에 추락했다.

그런데 모두 9명이 숨진 라이시 대통령 일행이 탑승한 벨-212 헬기는 기록에 따르면, 40~50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일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일행을 태운 헬기가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이 가까운 이란 북동부에서 이륙하고 있다./UPI 연합뉴스

미국의 벨 헬리콥터(현재 벨 텍스트론)사가 캐나다와 함께 개발한 중형 헬기로 1971년부터 판매됐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 수송용으로 쓰였던 UH-1N “트윈 휴이”의 민간용이다. 한편, 이스라엘의 군사 전문 매체인 Detali(detali.co.il)는 “라이시 일행이 탑승한 헬기는 벨-212기의 업그레이드 모델인 벨-214로, 이스라엘 공군에서도 오랫동안 사용한 모델”이라고 보도했다.

이란이슬람공화국이 이 미제 헬기를 보유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이란 왕정의 마지막 왕(샤)인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는 헬기의 광(狂)팬이었고, 재임 중에 300대 이상의 벨-212, 벨-214를 미국에 주문했다. 운송ㆍ산악 소방ㆍ무기 탑재 등 다목적으로 사용 가능한 헬기로, 이란은 이로써 한 순간에 중동의 헬기 군사 강국이 됐다.

팔레비는 1979년의 이슬람 혁명으로 쫓겨났지만, 주문한 헬기는 대부분 구입할 수 있었다. 라이시 대통령 일행이 탑승한 헬기도 1980년 이란 정부가 이란의 석유회사로부터 징발한 것으로, 이란 적신월사(赤新月社)가 운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고 헬기는 이슬람 혁명 직전에 구입했다고 해도, 45년 이상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유지ㆍ보수이지, 항공기의 연식 자체가 오래됐다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영국 센티널 항공의 CEO인 롤런드 데인저필드는 로이터 통신에 “1940년대 제작된 항공기들이 지금도 영국 상공을 완벽히 안전하게 날고 있고, 미국의 B-52 폭격기는 1950년대부터 계속 사용되고 있지 않느냐”며 “중요한 것은 제조사 원칙대로 헬기가 관리되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벨-212 기종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해상경비대, 태국 경찰도 운용하며, 미국에서도 여전히 사용된다.

이슬람 혁명 이후 미국의 무역ㆍ경제 제재에 놓이게 된 이란은 일부 필수 부품은 러시아와 중국을 통해서 구입하고, 일부는 임시변통으로 제조했다. 심지어 벨-212 기종을 통째로 밀수입하려는 시도도 했다.

라이시 대통령 일행의 헬기 사망과 관련해, 이란 정부 내부에선 은근히 비난의 화살을 미국으로 돌린다. 이란의 전 외교장관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는 이란 국영 TV 전화 인터뷰에서 “미국의 경제 제재 탓에, 이란이 필수적인 항공 부품을 구입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의 워싱턴 근동정책 인스티튜트의 연구원인 패트릭 클로선은 ‘이란 인터내셔널’ 위성TV 채널 인터뷰에서 “기본적으로 이란의 항공 안전 의식이나 실태가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2000년 이후 이란에선 20건의 항공기 사고가 발생해 1700명 이상이 숨졌다. 이 중 8건은 미제 항공기였고, 9건은 러시아제, 3건은 유럽제였다. 클로선은 “러시아 항공기는 부품 구입에 어려움도 없는데, 9건이나 추락 사고가 발생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워싱턴 인스티튜트의 또 다른 군사ㆍ안보전문가인 파르니 나디미 선임 연구원도 “안개가 자욱하고 비 오고 어두워지는 시간에 산악 지대에서 헬기를 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이건 ‘타느냐 안 타느냐’ 선택의 문제인데, 그들은 40년 된 미제 헬기를 타기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일부에선 “자살 행위와도 같다”고 말한다. 이란에선 벨-212 기종의 추락으로 2015년에도 3명, 2018년에도 4명이 사망했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에는 부품 밀수입과 역(逆)엔지니어링 기술을 통해, 기존에 서방에서 구입한 항공기들을 계속 운용해 왔다. 이란 내 헬기 관리회사인 ‘판하(Panha)’는 벨-212, 벨-214, 러시아의 밀(Mil)-17와 같은 9개의 미국ㆍ러시아 모델에 기초한 헬기 15종을 보수한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질문은 왜 ‘빅 사탄(Big Satan)’이라고 부르는 미국에서 만든 40~50년 된 헬기를 굳이 타고 갔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군사정보 웹사이트인 Detali는 이에 대해 “이란에는 1992년 생산된 러시아제 밀-17 헬기도 여러 대 있지만, 벨-212와 같은 미제 헬기들이 러시아제보다 훨씬 탑승감도 좋고, 소음도 적다”고 밝혔다. 이런 추정 외에는, 라이시 대통령 일행이 그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아직 구체적인 발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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